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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Reasons to Take Genesis as History
by Dr Don Batten, Dr Jonathan D Sarf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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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가지 적인 이유들로서 왜 창세기를 믿음으로 받아야만 하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가 작성한 Don BattenJonathan Sarfati
로 번역 김 정화

2천년전, 사도 바울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한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린도후서 10장 5절) 지나온 200 년동안 더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반대하는 철학과 보이는 것에 중점을 두는 자연주의로서 즉 그 기원과 모든 것을 기반하는 역사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이 관점은 하나님의 실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빅뱅설, 동일과정설 그리고 생물학적 진화설은 모두 자연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다만 약간의 놀라움으로만 여기기에는 이 세 가지의 이론들이 자연주의와 일맥상통한다는 어떠한 의구심은 들지는 않는가?

이들의 사상들과 관점들은 성경적 세계관과는 동떨어지다 못해 상치된다고 창세기 1–11 (창세기 1장 뿐만이 아니다.) 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좋으신 하나님의 섭리로 덮여있는 지극히 성경적이면서도, 그래서 과학적인 이유들을 창세기 1–11장들을 통해서 원하는 독자들이 모든것의 시작되신 하나님을 만나봄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역사관에 대해서도 되짚어 볼 수 있는 자성의 결과가 될 수 있다.이 소책자가 15가지의 성경적 그리고 세계관의 지성적인 이유들로서 왜 창세기를 믿음으로 받아야만 하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다른 번역본들은 과학적인 논증에 대해서 할애되었다.

1. 나사렛 예수는 역사를 구약을 통해 말한다.

예수님 자신 또한 신약과 동일하게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과 인간들의 손으로 쓰여진 바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최종권위성을 강조하셨다. (마태복음 19:4,5; 22:31, 32,43; 마가복음 12:26; 누가복음 20:37) 그리고 그러므로 심지어 어떠한 문자나 한 획이라도 성경에 적혀있는 한 ‘결코 사라지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마태복음 5:18; 누가복음 16:17). 한편, 예수님은 구약의 거의 모든 책을 그 권위에 두고 있으며 우리가 알다시피 성서의 진위성 또한 인용하셨다. 반유대적인 유목민들의 야영장 이야기나 원시적인 염소를 치는 목양자따위의 문맹원시인의 생각들까지 허용할 여지는 적어도 성경에 관해서는 없게 되는데 그 이유는 성경의 완전성때문이다.

성경 해석 (방법) 상의 정통적인 기법으로서 성경 안의 화자 (저자)가 가르치는 의도가 어떻게 예수님의 성경을 대하시는 관점이나 태도를 전해주고 있는지, 우리 자신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만 보지 말고 전체적인 맥락을 찾기위해 항상 노력해야 하는데 exegesis ( 성경을 읽을 때 오류 및 잘못된 태도-즉, 답안만을 찾고자 하는 성경읽기)를 또한 방지할 수 있다. 이것은 결코 성경을 단순한 책으로 공부에만 열중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으로 이끌어내신 그 성서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과 이끄심이 그에게서 있음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어떠한 변론에 맞설 때마다 ‘It is written.’ (구약) ‘Have you not read?’ 라고 대답하시며 그 근거를 분명히 성경에서 밝히셨다.예수님이 꾸짖으신 것은 다만 성경의 능력을 축소하는 데에만 그친 것이아니라 일반적으로 성경에 대한 무지에 관한 것이었다. (마태복음 22:29; 마가복음 12:24) 사실, 오늘날 많은 성경에 대해 조롱하는 자들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은 각 장에 나오는 성경 본문의 역사적인 정확성을 다시 한번 확인 시키신다. 참조로 근거.2 를 보기 바란다.

오류가 없고 정확함의 그 근거는 바로 예수님이시며 이 타당하고도 합리적인 진리는 또한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대변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설령 성경이 오류를 지닌다고 가정해 볼 지라도 그렇다면 오류의 발견 때마다 하 나님과 성경의 권좌가 빼앗겨 지는 전체적 오류에 빠지게 된다. 급진적 자유주의 ‘Jesus Seminar’ 에서는, in which lots are cast to determine which of the words attributed to Christ in the Bible were actually spoken by him, is a logical outcome of such an approach.

만약 오류가 없고 정확하지 못하다면 성경은 권위가 없다. 예를 들면, ‘원수를 사랑하라’가 오류이라면 ‘도둑질 하지 말지어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He is faithful and just to forgive us our sins’?

어떤이는 말하기를 ‘ 성경은 믿음과 실천에 있어서 그 권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모순적이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역사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믿음과 실천에 관한 신학을 신뢰할 수 있을까? 누가복음 16:31 에서 언급한대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 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 니라.’그리고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물으시며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한복음 3:12). 그래서 만약 우리가 성경에 나와 있는 과학적 사실들—지구연대기적 역사관을 인용할 수 없다면 영적 원리들—죄사함, 천국 그리고 윤리적 법은 어떻게 되는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익히 받아들여진 성경의 정확무오함은 The Chicago Statement 를 통해서도 알 수 있으며 ‘성경에 쓰여진대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을찌어다.

성경의 정확성에 대한 믿음이 wooden literalism (a common straw-man argument) 과는 다르다는 점을 다시 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여러가지의 비유나 과장법등으로서 그 사실의 진위성을 개인적인 기준이나 표준, 문법사적인 (텍스트) 해석의 상이함에 따라 판단력이 흐리게 될 수가 있진 않은지 짚어볼 필요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창세기 1–11장을 포함해서 성경의 문자 그대로가 이 소책자의 텍스트(본문)이다. 다른 논증자료 (J.P. Moreland, Wm.Dembski) 의 저자들이 쓴 straw-man arguments 들도 주의깊게 읽어 주길 바란다.

2. 나사렛 예수는 아담과 이브 그리고 노아를 역사적인 인물로 간주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을 통하여 과거에 회의론자들이 일어났거나 실제로 존재했던 것을 부정한다고 다시 한번 상기시키셨다: 아담과 이브 (마태복음 19:3–6; 마가복음 10:2–9), 아벨 (누가복음 11:51), 노아 그리고 대홍수 (마태복음 24:37–39; 누가복음 17:26–27), Abraham (요한복음 8:56–58), 소돔과 고모라 (마태복음 10:15; 11:23,24) 요나 그리고 거대한 바다괴물 (마태복음 12:39–41). 예수님이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면 회의론자들과 그들의 거짓말들이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를 창세기에 나와 있는대로 그를 위해 세워진 창조하셨지 수백억만년 후에 있는 인류의 기원을 논하는 것은 A.D 와 B.C로서 역사의 중심되신 기독교적 세계관에 반대하게 된다. (마가복음 10:6, 누가복음 11:50–51)

예수님은 또한 성육신되시며 하나님은 절대 실수가 없으시다. 젊은 지구와 그 우주관에 따른 논증에서 제기되는 예수님의 인성은 잘못되었는데 문제는 교회 내에서 이 젊은 지구론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말하면,예수의 신성을 포기하며 예수를 비하하는 것으로 특히 종교상으로는 이단으로 간주된다. (Phil. 2:6–11) 여기서 ‘자기를 비우심’이라는 것은 인간성에 더해짐이지 (‘the Word became fleshJohn 1:14), 어느 신성적인 면으로 보나 덜하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자원하여 그 모든 능력을 내려놓고 섬기셨다. 예. 전지전능하심, 하나님과의 분리성 ( 언제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실 시기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심), He could immediately switch them on at will, 예.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아는 것. 그러나 그러한 능력으로 그의 완전하고 좋으심, 진실무망하심 그리고 자비로우심을 그릇되게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설교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인격과 그 사랑을 진리로서 선포하시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마태복음 24:35, 28:18).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설교하시기를 그리고 선포하실 때에는 그 절대적인 권위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태복음 24:35, 28:18). 정말로, 예수님 자신께서 말씀하셨듯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6장 63절). 또한 그 말씀 중에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반성하게 하는 가르침도 주신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누가복음 9장 26절)

그보다 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순전한 권위로서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5:30, 8:28), 만약 비판을 가하는 자들이 예수가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예수에 대한 잘못된 견해는 대게 두가지 개념으로부터 나오게 된다.

  • 인간의 유한성에 관한 적응 vs 인간적인 실수에 대한 도모 : 첫번째는 두번째를 수반하지는 않는다: 한 어머니는 4살박이 딸에게 ‘ 아가야, 너는 내 뱃 속에서 자랐다’—라고 돌려서 말할 수도 있겠다.역으로 말하면, ‘황새가 우리 아가를 갖다주었지’는 완전한 거짓말이다. 유사하게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성경에서도 단순화된 비유 들과 (예: 지구에 관한 오늘날 모던 과학자들의 이론) 그리고 의인화는 거짓이 없고 참이다
  • 한계vs 오해, 착오: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성자되신 나사렛 예수가 인간으로 오셨기에 그는 전지전능하시지만 자신을 낮추사 제한하셨다. i.e. 그의 인간으로 오셨기에 모든 것을 알 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말을 오해할 수 있는 여지는 우리에게는 없다. 모든 인간의 앎은 제한적이며 그러나 이것이 모든 사람의 관점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도에 맞지않는다.

3. 창세기는 역사로서 쓰여졌다.

창세기 1–11은 Hebrew 특유의 그 문자 구조로서 역사적 기술을 이끌어 가며 그 문법적인 구조가 또한 일치되어 상용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창세기 12ff.와 출애굽기, 여호수아, 사사기등 대부분의 역사서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시나 알레고리가 아니다. 연이은 (and… and… and) 로서 waw (vav, ו) 는 창세기에서 엿볼 수 있는 역사서의 성격을 짓는다. Hebrew 동사의 형식들은 창세기 1장에서 보여지는데 그것은 정확하게도 Hebrew 방식의 역사기술법과 일치한다; 과거의 일련의 사건들. 그것은 가장 첫번째 동사인 완전함을 의미하며 그 다음에 불완전하다는 의미의 동사가 따라오게 된다. 창세기 1장에서 첫번째 동사인 창조하다는 완전하다, 반면에 종속되는 동사들은 불완전하다는 것으로 진행된다. Hebrew 시가 (여러 시편)에서 그 유사성이 창세기에는 거의 없고 다만 인물등을 인용할 때 사용된다.

창세기1장에서 발견되는 가장 명백한 유사성는 민수기 7장 10–84절에서 드러난다. 창세기나 민수기는 둘 다 Hebrew 단어 중 욤

(day) 라는 숫자적 개념의 설명을 포함하고 있다—숫자로 된 날짜를 의미. 민수기 7에서는 각 12 지파가 서로 다른 날에 제물을 드렸다:

  • 유다 지파의 Amminadab의 아들, Nahshon이 첫째날에 그 제물을 드렸다. …
  • Issachar의 족장 Zuar의 아들 Nethanel이 둘째날에 그 제물을 드렸다. …
  • Zebulun의 부족장인 Helon의 아들 Elibab은 셋째날에 그 제물을 드렸다. …
  • Naphtali의 부족장인 Enam의 아들 Ahira가 열둘째날에 그 제물을 드렸다. …

이 유사성을 엿볼 수 있는 곳은 민수기 7장만이 아니라 각각의 날마다 (욤)이 숫자로 매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문답형식으로 그 뜻이 강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vs 10 and 84 KJV) 보통의 날짜 개념에 따른다. 어느 특정한 날의 사용에도 불구하고, 민수기 7장의 날짜 배열 순서에 따른 이견 제시는 없고, 다만 여느 때에서 ‘in’ 이라는 전치사가 포괄적 의미가 결여된다. 이것은 어떤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논지인 창세기 2:4에 따라 창세기 1장은 보통 일련의 시간이 아니라는 것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히브리서에서 ‘때’라는 idiom이다 (see NASB, NIV Gen. 2:4).

민수기 7장과 같은 수사법과 일련의 숫자화된 날짜들은 단순히 어떠한 신학적인 가르침만을 제시하기 위한 시적 배경이라고 보기에는 어렵고 역사적 사실과 역사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맞지 않다. 민수기 7장과 창세기 1장은 문법적인 요소들로도 알 수 있듯이 그대로의 역사이다.

히브리어 학자들은 창세기가 역사서가 아닌 역사임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James Barr 라는 한 히브리 신학 학자는 (Oxford) 인용하여 적기를

‘ … 내가 아는 지식 한에서는 유수 대학의 히브리 신학이나 구약 신학 어느 교수도 창세기 1–11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제시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1. 6일 창조는 지금의 24시간과 같이 일어났다.
  2. 창세기에 나타난 숫자들은 창세기 처음부터 단순히 연대기가 더해짐으로 다음 장의 성경 말씀으로 들어가게 된다.
  3. 노아의 홍수는 대대적인 전 지구적 홍수였으며 노아의 방주에 있는 사람과 동물들을 제외하고는 다 멸절시켰다.

Barr, 이 학자는 neo-orthodox 한 세계관으로서 실질적으로 창세기를 믿지 않고 히브리어 문자가 제시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은 받아들인다. 그러나 Barr의 인용법은 창세기의 역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그것을 우려하는 데서 그 문제점이 기인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공격적인 증인이다. 전체적인 맥락에서의 창세기를 보지 않고, Barr는 저자의 의도를 확연하게 볼 수 있음에도 왜냐면 그 권위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도식적인 신학자나 엉터리 ‘evangelical’처럼 역사 그대로 믿지 않으면서 역사를 말하려는 권위주의일 뿐이다.

다른 히브리 신학자 (6일 창조에 동의하는)—는 다음과 같다:

  • Dr Andrew Steinmann, Associate Professor of Theology and Hebrew at Concordia University in Illinois
  • Dr Robert McCabe, Professor of Old Testament at Detroit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in Allen Park, Michigan
  • Dr Ting Wang, lecturer in biblical Hebrew at Stanford University.

4. 구약의 나머지 부분도 창세기를 역사로 간주한다.

가장 정통적인 해석 기법은 성서를 성서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 성경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지고 그 텍스트를 이해하느냐이다.

출애굽기 20:11는 창조주일을 맺게 된다. 이것은 어떠한 해석상의 연장선 상에서 야기되는 오류등이 (framework hypothesis, day-age Idea, 간격이론, God’s days etc) 6일 창조 안에서 제거된다.(v. 10): ‘6일 동안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사 일곱번째 날을 쉬시더라. 그러므로 안식일을 축복하사 거룩하게 하셨다출애굽기 20:1을 눈여겨 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사 …’ 이 말씀들은 하나님에게서 나옴이요, 모세의 것도 아니며 어떠한 redactor나 심지어 J,E,D,P 의 것은 더더욱이나 아니다.(오랫동안 그 가르침에 있어서 신빙성이 없는 많은 Evangelical한 신학원에서 있는 슬픈 현실이다)

Chronicles 1장; 아담의 후손에 까지 예수님의 족보를 창세기에서 살펴보면, 다른 많은 구약 성서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다 사실임을 볼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실제 사건들)

5.신약성서는 창세기 1–11을 역사로 간주한다.

신약이 어떻게 창세기를 해석하는가? 창세기 1–11 을 통해서 100개의 인용이 나오는데 그 수사법들이 보여주는 힌트는 창세기의 역사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누가복음 3장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는 ‘하나님의 아들’을 지칭한 것이지 원숭이의 자손을 말한 것은 아니겠는가! To those who say the early names are mere metaphors we ask: 우리가 그 계보를 따라 올라가 보았을 때, 언제쯤이면 사람들이 좀 더 그것이 단순한 비유학적이라는 것이며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라는 주장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의 영웅들,

아벨로부터 에녹과 노아등이 다른 역사적 인물들과 견주어 볼 때 중요성에 있어서 조금도 뒤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후서 3장은 인용하기를 이것에 두고 창조와 대홍수를 가리킨다고 한다. 여기서 그리스어 동사로 κατακλύζω (katakluzō), 그리고 이 고유한 단어는 전 지구를 휩쓸어 버린 창세기의 그 대격변의 홍수를 의미하며 보통 일련의 홍수가 아님을 πλημμύρα (plēmmura) 그 의미 상으로 알 수 있으며 누가복음 6장 48절에서 비교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아담과 이브의 창조 질서와 조화에 대해 언급하는데 디모데전서 2장 13절–14절에 따라 교회 안의 여성과 남성의 역할론을 견고히 하고 에베소서 교회를 예로 들며 거짓 선지자에게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인간의 첫 후손으로서 아담이 창조되었듯이 교회에서의 리더는 남성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디모데 전서 2장 13절–14절) 만약 인류의 조상이 원숭이라면, 이것은 이해가 가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성이 여성을 앞장 서 나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6.창세기 역사는 하나님을 반영한다.

창세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서술한다. 시편 33장 9절 기자에서 말한 대로 ‘그가 말씀하노니 그대로 되었도다; 그가 명하노니 즉시 말씀대로 되었도다

우리는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을 통해서 (창세기 전체,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직접 하신 말씀) 그 말씀 자체가 그의 창조 사역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하고 좋은 것(예: 급격한, 빠른 창조)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관한 다른 성경 구조와도 연결 질 수 있는데 예를 들면, 그가 무에서 유의 창조를 하셨을 때 분명히 그대로 되라고 말씀하셨다.비교하며 예수님의 믿음 신실했던 백부장과의 대화를 마가복음 8:5–13에서 나온 것을 보라: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당도하셨을 때, 백부장이 와서 도우심을 받아 를 청하기를 “주여” 말하며 “ 나의 하인이 집에 매우 아파 고통스러워 일어나지 못해 누워 있나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가서 고치겠노라” 백부장이 대답하기를 “주여 주께서 제 집에오시는 것이 당치 아니하나이다. 그러나 그저 말하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제가 군인들을 감찰하는 지위에 있사오니 내가‘가라고’ 명할 때 가고, 또한, 오나이다. 내 하인에게 ‘이것을 하라’하면 하나이다.
예수님이 이것을 들으시고 그는 놀랍게 여기시며 주위에 따르던 자들에게 가르쳐 말씀하시며,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내 이런 믿음 큰 자를 이스라엘에서 보지 못했느니라” 그리고 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기를 “가라! 네 믿음이 그를 살렸도다.”그리고 그의 하인은 바로 그 때에 낫게 되었다.

백부장이 깨달은 대로, 심지어 그의 명령이 다 이루어 진 것과 같이 하물며 예수님의 명령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순종적이고도 신실한 믿음이었다.

창세기에서는, 창조 시기에 대해 이렇게 나와 있다.

  • 명령의 말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가 있으라 … ”
  • 성취의 말씀: ‘~가 있었더라
  • 평가의 말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일을 마치심: ‘저녁이 있었고 아침이 있었더라, Day X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하실 때 다 이루어졌고 또한 24시간 내에평가까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창조사역에 관한 시간적맥락을 어기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 명령에 준하는 창조물로서의 응답을 할 수 없게 되어 그 관계성이 무너지게 되며, 창세기를 다른 성경의 부분들로부터 표류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7. 역사로서의 창세기는 죽음과 고난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기를 마치신 후에, 이렇게 선포하셨다. ‘심히 좋았더라’ (히브리서 tov me’od). 그러나 오늘날 ‘매우 좋았더라’ 라는 것과는 상치된다. 죽음과 고난이 하나님의 창조물에 완연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죽음은 ‘마지막 원수’(고린도전서 15장 26절)이다; an interloper.

성경은 인간의 사망이 타락에서 옴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로마서 5:12–19 and 고린도전서 15장 21절–22절). 고린도전서에서는 ‘첫 아담’의 죽음이 ‘마지막 아담’인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기 까지 심지어는 비교되고 고찰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크나큰 오랜 시간 연대기에 관한 오류이자 그 받아들여지는 방법론 때문에, 의문시 되어 왔지만 인간 화석들이 아담의 그 어떠한 발견된 것 보다도 오래 된 것이 맞는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면, Homo sapiens 화석들은 지적인 형태의 문화 활동으로 여겨지는 증거의 화석들이 있었고 이것은 160,000 년으로 추정되어 진다. 또한, Homo Sapiens의 두개골이 1967년에 에티오피아 남서쪽에 Omo River 가까운 곳에서 방사성 원소 연대 측정으로 195,000 년으로 다시 정정되었다.

물론, 화석작용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어떠한 장구한 역사관도 (백억만년의 이야기) 성경의 본질을 내포하지 못한다. 그러나 백억만년의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 상상불허한 yeon이라는 시간은 ‘cloud nine’에 떠다니지 않고 현실과 동 떨어져 있다. 이 여러개의 구성체들은 가정해서 600백만년을 두고 화석 잔해들을 남기고있다. 암 같은 종양 흔적이 남아있는 화석이 있다; 이것은 고난과 죽음의 기록이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인류가 백만년 전에 나타났을 때 셀 수 도 없는 실험들은 약육강식 (‘nature red in tooth and claw’, as the poet Tennyson put it). 그리고 누군가 왔는데, 말그대로 킬로미터나 산적한 뼈들에 묻혀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과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이 ‘좋았더라’ (창세기 1장 31절)라고 하셨을까? 그 얼마나 모든 것을 참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비교되며 심지어 모욕을 주는 일인가!

수십억년의 연대를 주장하고 있는 것에 반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좋으심을 변명없이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 할 수 있다면야 무엇인듯 못하냐는 제스쳐와 함께 얼렁뚱땅 비난거리를 찾고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폄하하는 데 동조나 할 것이다. (교회에서도 자연재해에 관한 의문이나 힘듦에 대해서 관행적으로 대해졌던 것 처럼). 창세기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있는 그대로의 신학이 쓰여야 하며: 그것은 창세기를 그대로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에 기인한다. (창세기는 그대로의 역사로서 여겨져야 하며 오직 하나의 관점만이 그럴싸한 허구의 신학을 배제한다.)

창세기 1장은 동물이나 사람들이 원래는 초식이었고 그것이 변질되어 왔음을 밝혀둔다 (vv. 29–30). 이사야 11:6–9; 65:25 에 따르면 미래낙원에 관한 비젼이 되풀이해서 보여지고 있는데 예를 들자면, 동물들이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아파 울며 하소연하고 그들의 목숨이 다른 동물에게 물어 뜯기는 것은 다만 부분적이라도 restoration이란 비젼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면 재창조, 그러함으로 창세기 3장에서처럼 저주마다 다 회복될지리라, 고난의 없어짐을 볾으로서 말이다. 그리함으로 수백억만년의 역사로 고난과 죽음을 다만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기는 것은 불가하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음이라.

로마서 8:18–25에서 단언하기를 그 모든 창조하심이 (다만 사람들만이 아닌) 다 헛된 것이라 하시며 고통으로 신음하며 속박 당하여 그 구원을 필요로 하는 피조물의 존재가 된 것이다. 명망있는 로마서 강해자인 F.F. Bruce, C.E.B Cranfield and James Dunn은 사도 바울이 여기서 타락을 가리킨다는 것을 밝혀둔다. 이것은 창세기 3장과 일맥상통한 엄연한 역사이며 사람들 뿐 만이 아니라 그 창조세계가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데 기인한다. 예를 들면, the ground was now to bring forth thorns And thistles (Gen. 3:18). There are thorns preserved in the fossil Record, supposedly some 300 million years before man came on the Scene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성경은 잘못 기인한 것이 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들어 온 인류의 죄로 인해 부패한 창조세계에 살고 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도록 창조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주로서 고백하는 자들의 창세기 전부터 알게 하신 바이다. 존 밀턴의 서사시인 ‘실낙원’ 과 ‘복낙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전에는 크리스챤 가치관으로 여겨졌던 것임이 틀림없다. 예를 들면, 가장 위대한 트리니티 교회의 영적 아버지로 여겨지는 Basil the Great, Bishop of Caesarea Mazaca, Cappadocia, ( AD 330–379) said: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된다, 많은 야생 동물들이 과일들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팬더는 어떤 과일을 취해서 먹는가? 사자는 무슨 과일로 식사를 대신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존재들은 자연의 법칙에 저항하지 않고 과일에 영양분을 공급받았다. … [그러나 이제] 그 사자는 육식동물이고, 이로부터 맹금류도 주검을 사냥하기 시작한다. 그 맹금류는 아직 바로 태어난 순간에 땅 쪽(the earth)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실 아무 것도 정해지지는 않으나 아직은 살아 있는 것을 먹게 된다. Nature had not yet divided, for it was all in its freshness: 사냥꾼들은 알아채지 못하였고 그랬기에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야수들은 그들의 먹이만을 물고 뜯을 뿐 그들은 육식동물이 아니었다.’

당대의 그리고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저명한 종교 개혁가인 존 칼뱅은(1509–1564) 이렇게 글을 남겼다:

‘참으로 또한 진실로 죄된 인간이 좀 더 나은 삶을 개척하고 영위할 수 있겠다; 그러나 거기에는 영혼과 몸의 분리가 없으며 타락도 어떤 파괴도 그리고 단순히 폭력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무엇이든 완전하지 않는 것들이 생산된다 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며 그러나 죄에서 오는 부패함이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레 (1701–1791), concurred that the Bible teaches this:

‘ 왜 이세상에 고통이 있는가; 하나님을 바라는 것은 “모든 이에게 사랑을 베풀며 그의 자비가 모든 그의 피조세계에 있음이던가?” 죄가 있기 때문에: 죄가 없었더라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 ( 단순히 겪게 된다고 여겨지는) 은 죄의 결과이다. [인류]는 악을 선택했다. 그래서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오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고통들이 죽음을 예비하게 된다.”
‘그러나 … 모든 새들과 야수들의 생존 세계에서도 어떠한 파괴력이나 서로 괴롭힘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에 생명을 주신 자 안에서 자비할지라.’

비그리스도인으로서 과학자인 David Hull이 이렇게 썼다:

‘진화론에 의거한 무엇이든 그 현상의 드러남도 기독교의 프로테스탄트의 하나님을 가짜로 만들 수 없다. (not the Protestant God of waste not, want not.) 그는 또한 우리를 사랑하사 그 만드신 자애로운 하나님이시다. 결코, 무시무시하리 만큼 시험을 안기시는 욥기에서 드러난 하나님이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익히 아는 바이다. Galapagos의 하나님은 부적절하고 쓸데없이 참견하고 동 떨어져서 거의 마술사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는 그를 향해 기도하려는 심령에게 기어코 그런 모습을 보이시려고 애쓰시는 하나님이시다. ’

그러나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실 때 완전하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은 후에 그렇게 된 것이다.타락에 대한 역사성과 그 이해는 더 나아가 신학의 완전한 실천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이들 뿐 아니라 특히나 생존 경쟁의 힘든 현실 안에서도 바른 가치관으로 믿음과 신앙을 지켜나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담과 이브 이래에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염두에 둘 점은, 소위 ‘진보적 창조론’은 진화론은 부정하되 아직도 백만년의 고통과 죽음의 과정들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믿는다는 점이다.

8. 창세기의 역사적 사건들은 복음의 기초를 이룬다.

로마서 5:12–17, 고린도전서 15:20–22; 45–49, 예수의 몸소 죽으심과 그 부활은 창세기 전반에 의미를 부여한다. 아담은 첫 계보로서 죽음과 함께 (‘to dust you shall return,Gen. 3:19) 그의 죄로인해 하나님의 ‘심히 좋다’는 그 피조세계에 부패를 가져왔다.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이신 예수님이 첫 계보였던 그 죄악됨을 사 하시려고 그 인류문명에 오셨다. 아담이 사망을 세상에 들여왔다면 완전하사 온전케 하시는 주 예수 안에 생명이 있다.

이 계보는 더욱이 주의 메시아 되심과 복음의 중심에 있다. 이사야는 오게 될 메시야를 문자 그대로 ‘Kinsman-Redeemer’라고 선포한 바 있다, i.e. 그가 구원하는 자들에게 피로 맺은 언약임을 의미한다.(이사야 59:20, 같은 히브리어를 사용하며 룻에 관한 보아즈를 예로 설명하고 있다). 이 히브리서에서는 또한 온 인류를 위한 그 십자가로 인한 대속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히브리서 2:11–18). 예수님은 천사들이 아닌, 아담의 후손만을 구원하실 수 있고 그 이유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와 그들이 친족되기 때문이다.

대주교 Hugh Montefiore’s Confirmation Notebook, SPCK 영국의 성공회 출판사 (1984) 에 의하면 창세기에 있는 그대로의 역사와 그 권위를 부인하는 데 있어서 금지해야 할 만큼 큰 결과들이 또한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인간은 진화의 결과이며 자연선택설에 의해 준거한다. 이기심과 공격심은 모든 진화의 단계에 필수 요건이나 마찬가지며 인간은본래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원죄’)… 를 태어날 때부터 갖게된다. 십자가는 그러나… 내 자신이 받아야 할 형벌을 내 대신 받아하나님 아바 아버지가 그 독생자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건 윤리적으로나 어떤 유라도 잘못된 일이다. 어떤 경우라도 단 한사람이 온 세계의 형벌들을 통틀어서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은 신약성경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대조된다.

9. 일관성 있는 기독교 세계관은 창세기에 의한 역사관에 근거한다.

성경은 주의 날에 대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이며 이 우주 가. (베드로후서 3장 10절–13절). 왜일까? 하나님은 불로 연단하사 정케하사 그 분의 일을 이루시고 그 영광을 드러내시사 창조하신 이 피조세계를 성경에 있는 그대로가 아닌 ‘과학적’인 가정 아래 기술하며 성경을 왜곡되게 한다면 학문의 기초는 여지없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논리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이 진리임을 알고 있을 때 (로마서 8장) 성경적인 역사관에 좀 더 다가설 수 있다.다른 말로 설명하자면, 말세에 관한 가르침이 다만 가벼운 경고가 아님을 알 수 있는데 과학적으로 설명되어지는 자연주의 역사관이 성경에 대한 권위를 아무것도 아닌 양, 그 거짓된 학문으로 혼동된 세계관을 설파하고 있다. (eschatology).

게다가, 대홍수의 역사성을 부인함으로서 eschatology를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이것에 대해 성경을 통해 인용하셨음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 17:26–27). 대홍수의 심판을 믿지 못한다면 왜 우리에게 다가올 심판에 대한 믿음이 있을까?

주목할 점은,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며 조롱하고 비난하는 자들이 말세에 있을 것을 예언했는데, 예수님의 재림을 부인하는 데 기인한다. 이들이 모든 것은 그저 그들의 근거인 그들이 가정한 학설에 의존해 모든 것은 끝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베드로는 이 철학에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모른 체하며 대홍수로하나님이 이 세계를 파괴했다’는 잘못된 믿음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베드로후서 3:3–6). 이것은 자연주의적 패러다임이 오늘날 사회 전반에 팽배해서 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베드로는 또한 대홍수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불의 재앙으로 있을것이라고 이어서 말했다. (7절).

성경이 나타내는 바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대홍수가 드러남이 너무도 확연하여 누구든지 그것을 부정하는 자는 의지적으로 무시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리이다 (로마서. 1:18–32 그리고 베드로후서 3:3–7). 만약에 진화론의 주장대로 우리의 기원들이 설명 가능되어진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행하심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믿어진다면, 그리고 대홍수 (현대지질학),에 관한 어떤 증거도 찾아 볼 수도 없다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죄를 벌하시지 않고 믿지 않는 이들을 그대로 붙잡아 두시는가?

10. 창세기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기독교를 현실과 동 떨어지게 한다.

사람들은 종종 ‘성경은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라고 말하거나 ‘성경은 신학에 관한 것이지, 과학이 아니다’, 아니면 ‘성경은 그 근거에 관한 것이고; 과학은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등등. The late Pope John Paul II 는 ‘두가지 영역의 magisteria’에 대하여 변호하기도 했다. (종교와 과학). 그러나, 성경은 크게는 역사서이며 그 신학은 그 역사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수님이 실제로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아마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을 택해서 믿는 자들의 말이지만 말이다. 이 자연주의적 주장이 얼마나 성경적인 역사관과 그 구원계획에서 사람들을 어긋나게 하고 있는지 모른다.

Australia의 Sydney에 있는 ‘evangelical’(부흥신학의) 신학교에서는 창세기가 단순히 a polemic;이라고 가르치는데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것을 신학적 statement 이며 또한 과학적임을 거부한다. 그러나, ‘과학’(i.e. the majority view of the current establishment) 이 주장하는 대로 우주가 무에서 저절로 exploded한 빅뱅설에 의존한 것이고 that every form of life made itself by purely natural processes from elements created in the big bang;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거나 무용지물과 같이 된다. 과학이 신학적인 claims를 하고 있거나 성경이 과학적인 claims을 하고 있다. word game과 같은 artificially segregate knowledge로는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신학교의 사례는 should appal the Churches that depend on them for pastoral training.

1894년에, 스코틀랜드 신학자였던 James Dwnney, 는 다음과 같이썼다:

‘종교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을 어떠한 방편으로 나누려는 시도를 한다면 그 종교적인 것이 진리이냐 라는 것을 묻는 것이며; 이것은 결국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다분히 예언적이지만; 이것은 정확히 일어난 것이고, 그 때부터 지켜 와 본 바 그래왔다는 것이다.

한 survey에서,어린이들을 상대로 선데이 스쿨과 초등학교스쿨의 선생님들 중에서 더 따르고 믿는 선생님이 누구인지 묻게되었다. 80% 가 초등학교의 교사들을 선택했다. 왜 일까? 그 이유는 사실 위주로 가르치는 학교 커리큐럼에 비해 종교 시간에는 주로 이야기로 수업을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좀 더 체계적으로교회와 그 교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을 이끌어주고 살피는 데 필요한교사의 역량에도 참조될 수 있을 것이다: as ethereal stories, disconnected from the real world. 듣기 좋은 이야기일테지만, 그저 도덕적인 메시지만 있다면 이솝우화처럼—실제로 일어난 일을 묘사하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많은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오늘날 그들의 생각을 2가지의 compartment로 나누어 왔다: 현실과 믿음; 그래서 많은 소위믿는 학자들까지 자연주의를 교실에서 설파하며 다시 교회에서는 믿음을 고백하는 일요일 예배가 되는 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face-value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거부하는데 아무도 이 두 가지를 분별해내는 확실한 방법을 찾아내지못했기 때문이다. Proponents of this distinction place Christian beliefs in the realm of ‘values’, i.e. mere personal beliefs that have no connection with reality. 그래서, 많은 안 믿는 자들이 기독교를 ‘존중’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떠한 이성적인 토론에도 그 희생정신이 감수되어야 하는 기독교의 실체에서는 입을 다문다.

그러나, 기독교는 완전한 진리이다 (the title of a book on these issue by Nancy Pearcey). 이것은 세계관이 성경에 근거하는 것을 보여주며, including its history, and about absolute right and wrong.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소 부활하심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고린도전서.15:12–19), 그러나 이것은 또한 역사의 증거이다. 3일 째 되는 날에 ‘검증가능한’ 추론임이 반증되었고 그것은 과학으로서는 이해되지 않는데 왜냐면 ‘자연법’은 사체는 썩고 분해되어 다시 생명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구분되는 생각은 많은 이들에게는 기독교는 단지 맹목적이고 어두움에서 도약하기 위한 반이성적인 것이라서 이성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도 여겨지게 하기도 한다.예를 들면, 한 번쯤 ‘예배’를 잘 드렸지하는 그 실제성에 관해서는 잘 모를 때가 있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예배’를 대체할 때가 있다. 무신론자들은 그러한 믿음에서는 분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불신앙이나 비신도들의 상대주의적 윤리관과 상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적인 기독교라고 볼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간증이요, 실제이다. (요한일서 1:3) 이것은 맹목적이거나 반이성적이지 않다. 그 이유로 성경의 역사성을 부인하지 않고 옹호하는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들이 strenuously 반격하는 것이다. (창조, 타락, 홍수, 출애굽, 예수의 부활하심, etc).

11. 초대 교회 리더들은 창세기의 전지구적 홍수의 연대기를 받아들였다. 두 가지의 이유들이 더 있는데 그것은 창세기가 어떻게 해석되었는 지에 대한 그 역사성을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한다:

  1. 일반적으로: 늙은 우주 해석법들이 통용되곤 해 왔다면, 성경이 최소한 이 문제에 대한 변론에서 줄 수 있는 답들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리고 ‘과학’에서 제기되었던 많은 이론들은 성경과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2. 더 깊숙히 들어가서, 교회안의 ‘암흑시대’를 변호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결점이기도 했던 ‘과학’주도의 사명이라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역사는 늙은 우주를 역사가들을 통해 반영케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 주장을 검증해 보는 과정이 중요하다.

Basil the Great ( AD 330-379), 6일 창조에 관한 설교가 연달아 있게 되었는데, Hexaemeron이 간단히 말해서 보통 날들(days)을 뜻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명령은 순식간에 shrubbery로 온 땅이 채워졌으며 나무들이 흔들리고 갑자기 강에 물고기들을 채우셨다. (Reason 6을 보라); 동물들은 본래는 서로 먹거나 하지 않았다 (Reason 7을 보라); 태양은 지구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등등. 그는 또한 기원과학에 토대에 관하여 다윈론에 반격한다. 다윈이 진화론이라는 발명을 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사상들은 예수님을 논박하여 반증하려는 데 기인한다. –그러한 철학자들은 Anximander, Epimenides and Lucretius이다. 세속적이며 그 속성이 하나님을 반 한다는 데 있다.

교회 교부들의 위치가 잘못 이해된 데에는 이러한 것들을 잘 못 읽고 해석하려는 데 있다. Eastern Orthodox Church (EO)에서 6일 창조 (The

Creation Week)를 지당하고 확실한 사실임을 총 7000년의 지구역사 속에서 예형론적으로 나타나는 시간 상의 연대를 확인 해 주고 있다. 그들은 6일 창조를 늙은 우주의 연대로 간주하지 않았다.

작고하신 Seraphim Rose, EO의 사제는 EO 교회의 교부들의 의견을 자세히 상술하여 수렴한 문서에서 그들이 젊은 우주론을 믿는 것으로서 창세기를 이해하고 있다고 한다. Dr Terry Mortenson, 현대 지질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신 분인데 그 책에서 이렇게 상술하고 있다:

‘ 그의 [Rose’s] 초대 교부들은 창세기의 해설을 집성했으며 그것은 지식의 근간이었다: John Chrysotom (344-407), Ephraim the Syrian (306-372), Basil the Great (330-379) and Ambrose of Milan (339-397).

그러나 그는 또한 창세기 1-11의 어떠한 면에 관하여 작필한 많은 교부들을 그 후 다음의 세기 동안 인용했다. Rose가 EO 교회 사제들에게 개별적으로 6일 창조와 그 역사성에 대한 의견을 물은 바 인류의 타락과 전 지구적 홍수까지 포함시켰다. 그들은 또한 믿은 바 순식간에 이루어졌으며 (Reason 6를 보라.) 그들은 타락 전의 세계가 타락 후와 현저히 다름을 보았다.

어떤 이들은 Augustine과 Origen 이 성경책에서 이것 저것 ‘암흑시대’에 관한 핑계를 대는 것 같다고 인용했다. 이 알렉산드리안 공회 학교 출신의 학자로서 여러 수사법을 성경을 통해 상용하셨다. 그들의 수사법은 성서적이지 않으며 플라토닉 학파의 시간논법등에 한정되어 있다. 이에 반해, Augustine 과 Origen은 그들이 수호하던 그들의 ‘영적암흑시대’를 수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과 그 창조하심에 그 무게를 더함으로 기나긴 시간들의 창조됨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강력하게 주장한 바 되었던 성경적 몇천년의 연대기에 또한 노아의 전 지구적 방주를 포함시켰다.

어떤 이들은 교회 교부들이 해석 상의 문제가 있어서 비판의 여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더 나은 해석 방법론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현대에서 기술하는 바는 성경의 의도적 언어와 배경이 되는 문화를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많은 향상된 번역이 성경을 이해하고 배우는데 필요한 것 같다.

12. 교회 개혁가들은 분명히 창세기 속의 역사성의 중요함을 역설한다.

칼뱅은 낮과 밤의 주기는 첫째 날부터 구성되어지고 태양의 창조됨 이전에 [“먼저 빛이 있으라” 하고 말씀하시며 명령하시고 계신다.”] 그리

고 ‘이러한 알 수 없는 주님의 질서는 그 능력에 의해 순식간에 창조되어진 피조세계에 있다. [거의 완전히 Augustine과 Origen와 그 의견이 일치된다.] 모세오경의 내용들이 6일창조를 주창하는 칼뱅파와는 다르게 단순히 명령들을 따라서 그 창조된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6일 창조의 공간에서 그는 하나님 자신께서 주시고 아끼사 보존하기 바랐던 피조세계를 인간에게 맡기사 심지어 거의 오천년 지난 후에도 그 우주만물의 창조하심과 40여일의 홍수가 사실상 전 지구적 물의 재난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그들은 우뢰와 같은 박장대소로 놀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루터는 심지어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더 심층적으로 그러나 알기 쉽게 창세기가 어떻게 역사로 이해되어 지는가에 대해 상술하고 있다. 여러 비판에 대해서는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드러난 비교수사법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창세기의 역사성에 관한 반대의견은 역사가인 Ronald Numbers’ book, ‘창조과학자들’을 인용하곤 하는데 민수기이다. 젊은 지구 과학자들이 a Seventh-Day Adventist, George McCready Price가 1920년에 창립한 것에 두고 있다고 민수기를 인용하며 가정해 오고 있다. 이것은 현존하는 사회주의적 수정주의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역사가인 Jeffrey Burton Russell이 단순한 신화라고 하면서 일반적인 그러나 교회사적인 지구가 납작하다는 것에 근거가 없음을 밝혀냈다. 민수기에서처럼, 간격이 있는 SDA,가 알리는 바로는 아무것도 Price 나 Ellen White 전에 나타나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교회 교부들이나 교회 개혁가들은 이상의 자료들이 민수기의 오용됨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나 훈육의 문제 이상이 있다. 지구 연대와 전 지구적 홍수에 대해 1800년도에 Dr. Terry Mortenson이라는 지질학자는 변호한 바 있다.

13. 무신론은 자연발생설을 수반한다-창세기는 역사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니다.

휴머니스트[무신론자] 는 우주와 인류의 기원을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보고 있음을 내포한다. 가장 최근에 나온 호 (III) 에서 집약적으로 ‘부수적인 진화’를 설명은 하고 있는데 이것은 중복일 뿐 (자연이 자연을 창조한다) 는 ‘주체자가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신론적 진화’는 모순적인 것이 (하나님이 이끄시는데 방향성 없이 하나님의 좋으심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Reason 7이 가리키듯이, 하나님은 그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매우 좋았더라’ 라고 하셨다는 점은 진화론적 투쟁방법 또한 백억만년의 긴 시간 연대가 지구의 역사임을 명시한 부작용일 뿐이다. 큰 소리

로 외치는 영국의 무신론자 Richard Dawkins는 말하기를 ‘다윈은 무신론자로서 필요한 지적인 것을 충족케했다.’ 다른 이들도 많이 동조한다. 미국의 Will Provine은 무신론자 생물 교사로서 Cornell에서 교육을 담당했는데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했다:

‘ … 현대 진화론에서 무신론자에 관해서라면 그것은 하나의 종교와도 같다.’

실제로, 진화론적 가르침은 무신론자들을 양산한다. 하바드 대학교 사회생물학자인 E.O.Wilson은 말하기를:

‘Alabama의 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나 또한 거듭난 크리스쳔이었다. 15살이 되자 나는 the Southern Baptist Church에 갔는데 그 곳에서 굉장한 열정과 원칙주의적 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등록을 하였다. Alabama 대학교에서 진화론을 듣게 된 후 17세에 그 교회를 떠났다.’

무신론자에게는, 진화론은 무신론을 정당화시키며 하나님의 실재성을 그들로부터 제거하는 데 아마도 가장 적당한 이유인데 ( 피조세계가 창조주를 요구한다.) So it’s not surprising that the most vocal and ardent defenders of evolution and ‘deep time’ are almost all passionate antitheists.

진화론 ( 우주 첨성의, 지질학의, 그리고 생물학의) 주장대로 만물의 기원을 그 신성을 부인한 채 설명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은 반성경적이며 하나님의 만유주재하심을 필연적으로 보이심으로써 사람들이 핑계대치 못함에 심판을 면치 어려움이라 (로마서 1:18–32).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조소하는 자들을 그 의지적 불순종으로 대홍수의 심판을 두게 하셨다 (베드로후서. 3절) 모든 늙은 우주론자들은, 거의 지질학적 층들을 동일과정설로 간주하는 것을 토대로 하고 있고 전지구적대격변 홍수가 사실이 아니라는 반복되는 패러다임으로 ( 지구표면이 급격하게라도 변했을 것이다라는 것을 반박하고 있다).

진화론은 원리적으로 본다면 종교에 가깝다. 캐나다인 철학자로서 창조과학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하는 Michael Ruse는 이렇게 말했다:

‘진화론은 단순한 과학이라기 보다는 그 추종자들에게서 상용되어지고 있다. 진화론은 사상적으로 세속적 종교로서 퍼졌다. – 기독교의 대체물로서 그 의미와 윤리성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열렬한 진화론자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배교하였지만 이것은 일종의 기독교에 대한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일 뿐이다. – 그리고 [ Ph.D 생화학] Gish는 그 중 한 명이다-문자 그대로 말이다. 진화론은 종교이다. 이것이 진화론의 시작됨이요, 아직까지도 그 영향의 폐해가 있겠다.

기독교의 대체물인 세속적 종교가 이르는 그 우스꽝스러움은 결코 하나님의 디자인은 아닐 것이다. 바알 숭배자들도 있다. Ruse는 이후에 책을 썼는데 다윈주의자가 크리스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으니 얼마나 다윈주의의 폐단이 크겠는가.

14. 올바른 역사관의 창세기를 간과해 버리는 결과는 이단과 배교를 낳는다.

창세기의 올바른 역사적 이해를 간과하거나 제대로 해 보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하지 못한 결과 반복적으로 많은 병폐가 있었고 주위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는 개개인들이나 가족들 교회들과 국가까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잘 알려진 한 무신론자는 부모님의 믿음을 버리게 한 데에 진화론의 역할을 크게 간증한 바 있다. 생물학자 E.O.Wilson이 말한 그대로 한 두명의 얘기가 아니다. Charles Templeton과 같은 배교자가 Billy Graham과 같은 전의 위대한 부흥전도자에게 호평을 받았던 이유들을 상고해보라. Templeton은 대부분의 가짜-지식적인 것을 이슈화했는데 창세기와 그 진위성을 두고 여론화했다. – 하나님의 왕되심에 반감을 드러내는 것과 일치한다. 창조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그리고 그 주권자되심을 부정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성공회 교회 (Victoria, Australia)에서 한 청년부 사역자는 그의 의견을 이렇게 나누었다:

‘16살이 되면 우리 청년부원들이 다 빠져나가는 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 화가 많이 나고 답답했었답니다. 그런데, year 10부터 과학시간에 진화론을 깊게 가르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과 얘기를 나누며 어떤 선생님들은 크리스챤 학생들에게 묻고자 했다고 합니다. 창세기와 진화론의 사실들이 무엇이 다른지와 어떻게 reconcile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답니다. 제가 청년부원들을 볼 수 없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겠죠. 저도 울음이 나올 것 같아 다시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1960년대 이후로 계획적으로 그리고 점차 진화론을 호주, 영국 그리고 미국에서 가르치고 설파한 결과 서방 세계에서 교회 출석률이 급격하게 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Josef Ton, 루마니아 침례교 목사였던 당시 공산 정권 아래에서 그 믿음을 지키느라 투옥을 당하고 말하기를: ‘ 자유신학과 진화론은 두 가지의 큰 죄목으로서 유럽의 교회를 결국 넘어뜨리고야 만 것일까? 자유신학은 진화론을 신학으로 세속화하는데 큰 기여를 할 뿐이다.’

세속적 학파 F. Sherwood Taylor (Curator of the Museum of the History of Science, Oxford) 는 비슷한 지적을 했다.

‘ … 영국에서 지질학은 그리고 진화론이 그 세속화에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옮겨가게 되었다.’

호주연합교회에서는 그 사태가 심각해서 창세기의 성서적 권위가 마모되고 훼손되기 까지 했다.

미국에서는 Princenton Seminary가 뚜렷한 증거이다: 달리 거론할 바 없는 그 장로교의 신학자이신 Charles Hodge는 늙은 우주 지구역사가 모자이크식 전개되어가는 straightforward한 것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면서 보기 드물게 과학의 권위와 아울러 성경에 대한 지식에 관한 그의 이해를 실었다. Thus ,even though he railed against Darwinism as rank atheism, the camel had its nose in the tent. 그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A.A.Hodge는 millions of years를 받아들이고 무신론적 진화론을 자체적으로 아무렇게나 만들었다. 그 다음의 계승자인 B.B Warfield ( 보수주의로서 잘 알려진 ‘Fundamentals’문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 이 성서의 ‘재조정’ 이 그를 다윈주의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다음 세대는 다윈주의나 millions of years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성서적 권위가 이것 때문에 잘못되었다. 그래서 J.Gresham Machen과 같은 보수진영도 따로 1929년에 Westminister 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하기까지에 이르렀다. Princeton은 더 이상 성서적 기독교를 변호하고 있지는 않는다.

많은 ‘부흥사적인’ 신학자들은 우리가 창세기를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과학’이 ‘long ages’와 진화론을 증명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신학 기독사관에도 반기를 든다. 그러나 자유신학을 표방하는 이들의 논리성과 일목요연함은 철저하다. 그들의 자체적인 해석법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심과 부활을 역사적인 사실이 아님을 ‘과학의 이름으로 부정할 뿐이다. 앞서 말한 신학은 창세기를 성경 전체와는 동떨어지게 해석하여 적용한 사례다. 창세기를 비롯한 성경의 권위가 무너지게 되면 그에 따른 의심과 혼란이 가중 될 뿐이다.

15. 창세기를 역사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허구적인 역사적 ‘과학’이 미래를 지배하게 하지 말라.

Dr. Pattle Pun, 생물학 교수로서 Wheaton College에 재직 중인 (and a believer in ‘deep time’), 그리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현대 부흥사적 신학자들이 또한 인정하기를:

‘가장 쉽고 명쾌하게 창세기를 본다면, 어떠한 과학적인 증거와 그 해석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6일만에 천지를 창조하사 아담과 이브의 타락으로 사망의 권세가 이 세상에 지배하게 되고 그 결과로 전 지구적으로 휩쓸고 간 노아의 홍수는 노아 가족들과 동물들을 구하지만 그 화석들로 증거를 제시하여 준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이 관점은 그 권위가 성경 밖에서 창세기를 재해석하여 본래의 의도를 간과한 점이 있으며 더한 것이 있다.다른 인용들을 잘 알려진 ‘부흥전도사적인’Dr. Pun과 같은 성경학과 과학자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반대로, Dr.John MacArthur, 미국의 부흥사적 신학자이자 목사님로서 언급하기를:

‘성서, 과학이 아닌 성서만이 모든 진리와 사실의 결정이 된다. 전도와 부흥이 그 결단과 헌신에서 온다면, 부흥사에서 오는 어려움들이 없어질 것이며 좀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해 품으신 긍정적인 소원을 이루게 하시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이 소책자에 소개된-과학에 관하여

이 책에서는 의도적으로 과학적인 이슈들을 다루지는 않았다. ‘신학은 학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몇 년간 사회학 교수로서 University of Washington에 재직중이던 Rodney Stark는 이렇게 쓴다.

‘종교와 과학에 상응하는 혼란이 없다고 할 수 없고 기독교 신학은 과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Christian theology was essential for the rise of science. 이 논문은 종교가 “Dark Ages”를 만든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로마시대가 무너진 후에 유럽을 잠식한 철저한 무관심과 미신 속에 콜롬버스의 [flat earth] 스토리가 허구가 아니라고 여겨질 만 하다. 사실상 이것은 각광받을 만한 지대한 기술적 진보이기도 하다… 16세기에 일어난 과학혁명은 11세기에 시작된 크리스챤 장학제도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과연 유럽에서 일어난 과학적인 혜택이 … 다른 여타 국가권에는 어려웠 던 것일까? 저자는 기독 신학의 원리에서 그 유일한 면모들을 찾는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그 일정한 축(구심원리들)이 없이는 불가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1. 우주만물은 실재이다 (왜냐면 그것은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창세기 1), 동양의 미신은 허구라고 믿고 있다.
  2. 우주만물과 우주 그 자체는 질서정연하며, 하나님은 그 질서의 하나님이지 혼란의 하나님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14:33. 그러나 창조주자체를 믿지 않으려고 한다면, 제우스를 믿을 것인가? 어떠한 동양 종교들이 맞는 것이라면 우주가 하나의 위대한 사상이라면 한 순간에 그것은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릴 것이다.
  3.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세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창조된 자로서 신성하신 하나님과는 다르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 아래, 그 지배에 두는 것을 끊임없이 훈련해야 한다. (창세기. 1:28)
  4. 인간은 생각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의지를 관영한다; 화학 작용은 설명이 완전하게 될 수 없다. 이것은 유물론적 관점과 또 다른 물질관의 관한 성경적 논지이다. (예: 창세기 35:18, 사무엘 상 17:21-22, 마태복음 10:28). 이 관점으로는 인간은 단순한 물질로 만들어진 두뇌가 아니며 의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물질주의가 사실이라면, 그 생각이나 사상들 또한 그 두뇌의 한 현상이고, 화학작용의 법칙에 한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에 기반하여, 물질주의자들이 그들의 뜻을 옹호하려 한다면, 그것은 화학작용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왜 그들의 단순한 두뇌 화학 작용이 상호 간에 연계가 되는 것일까? 현실적으로 물질주의자들이 맞다면 그들의 믿음에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그러나 물질에서 자유롭다고 스스로 자부하거나 평가하곤 한다. Genuine initiation of thought is an insuperable problem for materialism.
  5. 인간은 이성적이며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며, 그리고 논리 그 자체가 학습 목표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연역적 논증으로 (창세기 1:26–27),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 그리고 말씀(logos) 이시다. 상식적이고 논리적으로 여겨지는 것들에 대한 반감은 그 이유가 있게 되는데 사실은 창조자되신 그 분의 존재에 대한 죄성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이 타락에서 온 것인데 타당치 않은 곳에서 자신의 합리성만을 주장하려 함으로 자존감이 없어지게 되고 그 창조의 섭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다른 이들을 진화론으로 헛된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면, 타당한 논증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이득을 억지로 꾸며서 취하려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6. 결과와 기록은 정확하게 기입되어야 하며, 하나님은 거짓 증인을 금지하신다. (출애굽기 20:16) 진화론의 진위성이 타당치 않다면 ‘거짓’이라고 말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놀랍지만도 않지만, 사기는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어버린 사회현상이다. (진화론의 주도로서) 과학적 설계이겠지만, 그것은 비즈니스나 정치계에서 만연하는 것이 현대 시대의 애상이기도 하지만 사실이다.

개혁 당시에 과학이 번창하게 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성경 중심적인 중앙집권적이고 대대적인 크리스챤 미셔너리의 발로였다. i.e. 서유럽. 과학의 유용성을 가장 값지게 성장시킨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미국으로서 과학 첨단을 향한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기억하는가 진화론이 배제된 교육계의 미국 때-스코프스 재판 과 Spuntnik의 nadir 속에서 더 많은 노벨 과학 수상자들이 이 국가에서 배출되었다. 진화론을 완전히 배제하기가 불가한 생리학과 의학의 분야 (이하 생물학) 만 제외하고는 미국에서는 전 세계의 노벨 과학 수상자의 숫자를 그의 2배로 넓혀갔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비젼이 참으로 타당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만약 그의 말씀이 아니면 이러한 귀한 사역이 허락될 수 있었을까 과학자로서 심심한 감사를 올린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세계에 대한 그 오묘한 질서와 과학을 선물로 주셔서 탐구하여 다른 이에게 소개하게 하신 이 과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기원과학 그리고 응용과학

우주의 기원을 인간적인 시점에서 살펴보는 ‘과학’과 오늘날 첨단 과학은 주제가 다르다. 응용과학에서는, 반복적인 실험을 함으로 결과를 유추하는 것이며 기원과학에서는 다시 반복되어 질 수 없는 과거의 기원과 그 역사를 논리로서 유추하는 것이다. 어떤 종교관에 상관 없이 물은 100 도가 되면 주어진 온도에서 ( 포스트 모던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상-다원주의) 끓게 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에 관해서나 기원과학을 이해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작고한 화석학자 Stephen Jay Gould는 이 철학의 타당치 않음을 인정한 바 있다. ‘사실들을 기록한 자료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로 쓰여질 수 있다. 이론들은 아이디어들과 그 사고 체계의 구조까지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오류나 오점들이 이 모든 범위를 지배한다. 최근 철학자들은 역사적인 사실들이 그대로가 아니고 해석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해석학적 관점은 완전히 자연주의를 표방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 패러

다임에서는, 심지어 ‘종교’ 와 윤리의식까지 진화 (변형/변질) 하게 된다.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그 밖에는 없다. 자연적인 것 (물질, 에너지)가 믿는 것의 전부이다. 다음 간증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심지어 모든 데이터와 자료들이 지적설계자를 증명한다 해도, 그 가설은 받아들여 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학이 자연발생설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교의 전직 회장이었던 James Conant는 이러한 부차적이기까지 한 historical ‘science’에 대해 언급한다:

‘과학의 체계는 서로 다른 기반에서 오게 되는 일정한 상수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기괴한 어떤 패러다임이 일정한 시기에 예를 든다면 몇천년 전에 그것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덧붙여져 만들어진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과학의 질서마저 아무렇게나 헤집어 놓듯이) 그 결과는 역사도 과학도 아닌 하나의 우상 숭배일 뿐 그 무엇도 아니다.

사실상 실험으로 하는 과학(현대의 그 많은 물질적 혜택을 부여했던)에서는 성경에서 상치되기 때문에 그 안에 실제적인 것도 실재한 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이 바로 historical science의 현주소인 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목적이나 문제 해결을 위하여 가령적인 과학의 부연적 설명을 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하셨듯이 ‘내가 이 땅을 세울 때에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욥기 38:4) 어떠한 paleontologist나 지질학자도 없었고; 지금처럼 scaps and bits and pieces가 있고 그것으로부터 유추해내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자연주의 패러다임이 상용이 되도록 고안한 것이다. 얼마나 극대한 효과를 보는 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믿고 살아간다: 태초에 스스로 계신 자 하나님이 홀로 계셔왔다. 그의 창조세계에 일하심은 그에게 전적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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