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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창조과학자

찰스 베비지 (1791–1871)

계산의 아버지며 헌신적인 기독교인

저자: Ann Lamont
번역자: 한국어창조과학회 (creation.kr)

찰스 베비지(Charles Babbage)는 1791년12월 26일에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벤자민(Benjamin)은 은행가인 동시에 부유한 상인이었다. 베비지 가족은 런던 바로 근교인 Surrey의 Walworth에 살았다. 찰스는 네 자녀 중 장남이었는데, 남동생 둘은 어린아이 때에 죽었다. 1799년에 찰스가 심하게 아팠을 때 그의 부모는 그를 Devon으로 옮겨서 보다 건강한 시골 공기를 마시게 했다. 찰스는 Devon에서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택한 과목에는 간단한 항해를 위한 수학과 회계학이 들어 있었다. 이것이 관심의 시작이 되어서 그의 직업으로까지 이어졌다. 항해에 있어서 계산을 잘못하면 종종 파선을 야기시킨다. 찰스는 오류를 없애기 위하여 수학과 천문학의 표를 정확하게 계산하여 프린트할 수 있는 기계를 개발하는 데에 대부분의 그의 일과를 바쳤다.

찰스는 병에서 회복되자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는 엔필드(Enfield)에 있는 학교에 들어갔는데, 수학에 대한 그의 능력이 두드러졌다. 1803년에는 그의 가족이 Devon으로 모두 이사했다. 찰스는 1810년까지 Totnes 중등학교(Grammer School)에 다녔으며, 그 다음에는 캠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컬리지(Trinity College)에 입학했다.

그는 수학을 배우는 데에 아주 열심이어서 여가 시간에도 수학에 관한 책에 몰두했으며, 그 중에는 불어로 쓰인 책도 있었다. 그가 강사들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최근에 프랑스에서 발전된 수학에 대해 그들이 무지하다는 것에 대해 놀랐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적대감이 있었으며, 프랑스 혁명과 같은 폭동이 영국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블레이즈 파스칼(Blaise Pascal)과 같은 프랑스의 수학자나 과학자를 공부한다는 것은 비애국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수학자들은 독일에서의 발전에 대해서도 등을 돌렸다. 이렇게 유럽 각국으로부터 나오는 개념을 거부함으로써 영국의 수학 발전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다.

베비지와 같이 유럽에서 발전된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은 비애국적인 자유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었으며, 편협한 동료들로부터 적대를 받았다.

1812년에 베비지는 그의 두 친구와 함께 캠브리지에 Analytical Society를 설립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저명한 천문학자 존 허쉘(John Herschel)이며 (베비지와 같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수학자 조지 피콕(George Peacock) 이다. 궁극적으로, Analytical Society는 영국 대학에서의 수학을 개혁하는데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베비지는 1814년에 수학학위를 받았으며, 같은 해에 조지나 휫트모어(Georgina Whitmore)와 결혼했다. 그들은 약 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유아기를 지나 살아남은 자녀는 다섯명 뿐이었다. 조지나는 1827년에 죽었다.

베비지는 결혼하자마자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몇군데 교회의 빈자리에 응모했다. 불행하게도, 교회 지도자들은 베비지가 비애국적인 자유주의자라고, 정당화되지 않은 평판을 너무나 많이 듣게 되어, 그의 제의를 거절했다.

교회는 수학자를 잃었다. 찰스와 조지나는 18l5년에 런던으로 이사했다. 거기서 그는 수학에 대한 실질적인 그의 능력을 발휘했으며, 수학의 이론에 덧붙여서 실험의 장점에 관하여 몇번의 강의를 했다. 이 연구의 결과로 1816년에 그는 영국의 과학자들에게 명성있는 학회인 왕립 협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l817년에는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다음의 몇 년 동안 베비지는 대수학이나 함수론과 같은 순수 수학의 분야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수학자와 항해자, 과학자들의 격려로 그는 해석 기계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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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bage’s revolutionary calculating machine, which he called a ‘difference engine’. He demonstrated the small version of this machine to the Royal Society, and gained their immediate support.

1820년대 초반에 그는 20자리 수의 용량을 가진 계산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여섯 개의 톱니바퀴를 가진 작은 계산 기계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그것이 계산을 정확하게 해낸다는 것을 왕립학회에서 증명하자 그들은 그에게 열렬한 지원을 해 주었다. 그 결과 정부에서도 그가 '미분 기계'를 계속하여 개발하도록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기로 동의했다. 베비지는 수학의 표를 자동으로 계산하고 프린트함으로써 사람의 오류를 없앨 수 있는 미분기계를 설계했다. 그는 이 작은 기계를 이용하여 1827년에 로가리즘 표를 만들었다.

베비지는 1826년부터 1835년까지 캠브리지 대학의 수학 교수이었지만, 그는 거의 강의를 맡지 않았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대부분의 그의 시간을 연구에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더 큰 기계를 만드는 것은 경비가 많이 들었다. 정부의 기금은 충분하지 않았으며 그나마 관료적 형식주의로 지급이 늦어졌다. 처음에 베비지는 거의 돈이 없었다. 그러나1827년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그는 큰 부자가 되었다. 자기 자신의 기금을 합하여 그는 그 과제를 계속 수행할 수 있었다.

그는 1830년대에 이어서까지 미분기계를 개선하기를 계속했다. 그때 그는 50개의 자리수를 갖는 숫자 1000개를 저장할 수 있는 '해석 기계'를 생각해 냈다. 불행하게도, 베비지는 그의 해석 기계가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지는 못했다. 새로운 기계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데에 드는 비용 때문에 그는 계속하여 재정적인 곤란을 겪었다. 그 당시에 가장 큰 문제는, 충분한 정밀도와 유연성을 갖는 부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술적인 실패가 베비지를 깊은 절망에 빠뜨렸다.

베비지는 자신이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을 동원하여 불가능에 도전하였다. 그런데, 그 해석 기계의 배경에 있는 개념과 원리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었다.1 1937년에, 출간되지 않은 베비지의 노트가 발견되었을 때 이것이 입증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설계를 재조사하였다. 1940년대의 기술로 현대의 컴퓨터가 등장하게 되었다. 베비지는 요즘에 사용하는 컴퓨터 하드웨어(기계)의 전신(前身)을 생각해 냈을 뿐 아니라, 프로그램(요즘의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기능을 발휘하는 원리)에 대한 필요성도 생각했었다.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방법에 대해 베비지가 생각했던 개념은 현대의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사용하는 기술과 거의 유사하다.

베비지는 1831년에 영국 과학진흥협회(British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의 창립회원이 되었으며, 왕립 천문학회의 창립을 도왔다. 그는 또한 1834년에는 통계학회의 설립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신뢰성있는 보험통계의 표, 즉 보험회사에서 사용하는 '보험금액' 표를 최초로 편집하였으며, 영국에서 현대적인 우편 체계를 수립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베비지는 많은 것을 발명하였다. 그는 속도계, 기관차의 앞에 사용하는 배장기(排障器, cowcatcher), 의사가 우리의 눈 내부를 들여다 볼 때 사용하는 기구인 검안경의 전신 등을 발명하였다. 그는 또한 공장에서 사용하는 수 백 가지의 기구와 기계 장치를 발명하였다. 기타 다른 발명품 몇 가지는 광산과 건축물과 교량의 건설에 사용할 수 있다.

베비지의 발명품과 그의 연구기술은 영국이 세계에서 산업 선두주자로 부상하는 시기에 영국의 산업기술 발달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그의 친구 벅스톤(H. W. Buxton)은 자기의 자서전에서 베비지를 성실한 사람으로 묘사했다.2 영국의 산업과 과학의 진보를 위한 추진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확신시킬 수 없다는 데에 좌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비지는 그에 대한 지지를 중단한 사람들을 절대로 헐뜯지 않았다. 그는 수학과 과학에 관한 많은 논문들을 썼다. 1837년에는 Bridgewater 논문중의 하나를 썼다. Bridgewater 논문이란, 창조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와 선하심에 관한 논문으로, Bridgewater 백작이 제공한 돈으로 왕립협회가 출간한 것이다. Anthony Hyman은 베비지에 관한 자서전에 이렇게 쓰고 있다. 베비지는 과학적인 방법을 궁극적인 한계까지 추구하다 보면 결국은 계시된 종교와 전적으로 상통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으며, 그 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아홉 번째의 Bridgewater 논문을 썼다.3

베비지의 신앙은 단순히 과학과 기독교의 상통성을 인식하는 것을 넘어선다. 벅스톤은 이렇게 말한다. ”베비지는 과학적인 정밀도를 가지고 자연의 작품을 연구하는 것은, 그들의 신성한 작가의 지혜와 선하심의 증거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에 있어서 필요하고도 불가결한 준비물이라고 믿었다.”4

찰스 베비지는 1871년 1O월 18일에 79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죽었다. 죽을 때에 베비지는 그의 종교적인 신앙, 특히, 기독교인이 갖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확신으로 인하여 매우 평안했다.5

베비지는 현대 계산의 아버지라고 기억될 것이지만, 그는 또한 헌신적인 기독교인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참고 문헌및 메모

  1. A. Feldman and P. Ford, Scientists and Inventors, Bloomsbury, London, 1989, p. 125. 텍스트로돌아 가기.
  2. H.W. Buxton in a biography of Babbage held in the Museum for the History of Science, Oxford, UK. Cited in: A. Hyman (Ref. 3 below), p. 251. 텍스트로돌아 가기.
  3. A. Hyman, Charles Babbage: Pioneer of the Computer,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p. 14. 텍스트로돌아 가기.
  4. H.W. Buxton, Memoir of the Life and Labours of the Late Charles Babbage Esq., unpublished, p. 1986. Cited in: J.M. Dubbey, The Mathematical Work of Charles Babba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78, p. 227. 텍스트로돌아 가기.
  5. Hyman (Ref. 3), p. 253. 텍스트로돌아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