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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불독 - 토마스 헉슬리

그리고 헉슬리와 윌버포스의 옥스포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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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한국창조과학회 (creatio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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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1859년 자신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 발표가 불러일으킨 과학적, 신학적, 도덕적 논쟁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토마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1895)는 그 논쟁에 뛰어들어, 스스로 자신을 ‘다윈의 불독(Darwin’s bulldog)’이란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1

다윈은 그를 ”나를 대신하여 복음 즉, 악마의 복음(devil’s Gospel)을 전하는 착하고 친절한 대리인”이라 불렀다.2

1860년대에 인간의 유인원 조상(ape ancestors)과 동굴 인류(cave men)에 대한 이야기로 청중들의 넋을 잃게 하고, 격분시킨 사람은 다윈이 아니라 헉슬리였다. 추기경에서 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런던은 그의 재치 넘치는 강연으로 애태우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튼 손에 수염이 덥수룩한 노동자들이 인류의 조상에 관한 그의 강연을 듣기위해 무리지어 몰려왔다. 그는 오늘날의 복음 전도자 또는 대중음악 가수에 열광하는 부류의 군중들을 끌어들였다.”3

”그의 선동, 즉 서양의 새로운 신앙인 불가지론(agnosticism, 이 용어는 그가 만들었음)이 세상을 휩쓸었다.”3

젊은 시절과 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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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헉슬리

토마스는 1825년 런던 근교의 일링 마을에서 헉슬리 집안의 8남매 중 7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그는 가난하게 자라 정규 학교 교육은 2년밖에 받지 못했다. 교회가 부자들의 사치품이었던 1840년대의 열악한 산업지역에서 살면서, 그는 독학을 통해 신분 향상을 추구하였다.

그는 12살 때에 제임스 허튼(James Hutton)의 책 ‘지구의 이론(Theory of the Earth)’을 읽으면서, 성경에 상반되는 지질학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역사, 과학 및 철학 서적의 열렬한 독자였던 그는 채링크로스 병원(Charing Cross Hospital) 의과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거의 모든 지식을 독학으로 습득했다.4 그는 런던 대학에서 의학사 시험 중 Part 1을 해부학 및 생리학 과목에서 수석을 차지하면서 통과했지만, Part 2에 응시하지 않는다.5

그 후 헉슬리는 남극해 측량선인 HMS 래틀스네이크(HMS Rattlesnake) 호의 보조 외과의사(외과의사의 조수)가 된다(1846-1850). 그는 정규 학사 학위를 취득하지 않았지만6, 이 항해에서 얻은 다양한 해양 무척추동물의 구조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면서, 영국 과학계에 진출하기 위한 발판을 확보한다.7 1851년, 25세의 나이에 그는 왕립학회 회원(F.R.S.)으로 선출되었으며, 또한 1852년 이 학회는 1년 전 찰스 다윈이 수상했던 로열 메달(Royal Medal)을 그에게 수여한다.

헉슬리와 다윈

1859년 11월, 다윈은 자신의 저서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을 발표한다. 다윈은 ‘무신론자로 비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20여 년간 그 발표를 미루고 있었지만, 알프레드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가 1년 전에 보냈던 편지에 자극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그 편지에서 월리스는 다윈의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과 동일한 견해를 밝히고 있었다.8

다윈은 그렇게 말하지 않도록 조심했지만, 궁극적으로 종의 기원은 인류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단지 유인원(ape)에서 진화되었을 뿐임을 의미했다. ”그러나 천국의 약속이나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왜 우리가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9 다윈은 이러한 모든 논쟁을 피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헉슬리는 그렇지 않았으며, 그는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차피, 원숭이에서 진화되는 것은 먼지에서 진화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라고 썼다.10 따라서 헉슬리가 대의명분을 필요로 했던 것 못지않게, 다윈은 대변자가 필요했으며, 곧 이어 다윈은 헉슬리를 자신의 ”가장 열렬하며 중요한 후원자”11 이며, 또한 ”저주받을 이단을 전파하는 나의 착하고 존경스러운 대리인”12이라고 말한다.

헉슬리는 진화의 자연성을 열광적으로 지지하였지만, 놀랍게도 진화의 메커니즘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진화 속도에 관해서는 다윈과 의견이 맞지 않았다. 예를 들어, 다윈은 도약 진화 또는 ‘급격한 변화’를 모두 배제했다. 이로 인해 헉슬리는 다윈에게 쓴 편지에서, ”당신은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Natura non facit saltum)‘라는 것을 서슴없이 받아들여, 당신 자신에게 필요 이상의 어려움을 안겨주었다.”라고 말한다.13 또한 헉슬리는 인공선택과 자연선택 간의 유사성, 교배, 그리고 부모의 발달된 특성이 후손에게 전달된다는 다윈의 범생설(Pangenesis)에 동의하지 않았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헉슬리의 이러한 모든 양면성이 다윈의 학설에 관한 그의 광신적이고 적극적인 옹호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법학 교수인 필립 존슨(Phillip Johnson)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진화론적 자연주의 신념은 진화론자들의 다양한 집단이 결속되어서 나온 것이지, 어떤 명확한 체계적 명제에 관한 합의가 아니다.”15

헉슬리가 이와 같이 행동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학자인 게르트루드 힘멜파브(Gertrude Himmelfarb) 교수는, ”헉슬리는 한이 많은 사람이었다. 성직자들에 비해 낮은 과학자들의 신분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자기 발뒤꿈치를 ”성직자들의 입안에 넣고 짓이길 수” 있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종의 기원은 그에게 그 기회를 부여했다”라고 말했다.16

헉슬리와 복음

비록 헉슬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복음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으며, 반성경적 믿음인 진화론적 자연주의를 지지함으로써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기독교인(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었다 :

”기독교 신학이 히브리 성경의 진실성 위에 서있다는 것을 한 순간이라도 의심하는 기독교인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당혹스럽다.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의 개념은 유대교 역사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나사렛의 예수와 메시아를 동일시하는 것은 히브리 성경 구절의 해석에 달려있는 것이다. 성경이 역사적 특성을 갖지 않는다면, 그에 관한 증거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여호와가 아브라함과 약속하지 않았다면, 할례와 제사를 여호와가 명령한 것이 아니라면, ‘십계명’이 하나님의 손으로 석판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면, 아브라함이 테세우스와 같은 신화속의 영웅과 다를 바가 없다면, 노아의 홍수가 꾸며낸 이야기라면, 인류의 타락 이야기가 전설이라면, 창조 이야기가 한 선각자의 꿈이라면, 이러한 모든 분명해 보이는 실제 사건들의 확실하고 구체적인 기록들이 로마제국의 이야기보다 역사로서의 가치가 없다면, 이런 것들보다 훨씬 불분명하게 언급된 메시아에 관한 교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또한 이러한 빈약한 꾸며낸 이야기를 확실한 사실로서 믿고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세웠던 신약성경의 저자들의 권위는 무엇이 되는가?”17

헉슬리는 ”노아의 홍수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상세한 사실의 필연적인 결과임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라고 덧붙이고 있었다.18 그리고는 노아의 홍수가 단지 지역적 홍수였다고 말하는 신학자들의 주장에 관하여 ”어린 아이라도 그러한 주장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 것이다”라고 말했다.19

계속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예수가 사실로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라고 말했다면, 노아 홍수가 실제로 일어났음을 예수가 믿었다는 것인가, 믿지 않았다는 것인가? 내가 보기엔 그 이야기는 노아의 아내와 며느리들을 언급함으로써, 홍수 전의 사람들이 결혼을 했고, 자식들을 결혼시켰다는 사실을 성경이 확실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으며, 그 이야기를 틀림없는 사실로 확고히 믿는 자가 그들의 일상사를 기록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더욱이 하나님이 죄악을 심판하는 방식의 한 실례를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사실로 설명하고 있다면,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지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싶다. 부주의한 사람들을 휩쓸어간 노아의 홍수가 없었다면, 늑대가 없을 때 ‘늑대’의 울음소리보다 더 좋은 경고는 무엇인가? 만약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3일 동안 있었던 일이 '인정된 사실'이 아니라면, '앞으로 다가올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프랑스에서처럼 보수당의 연설가가 중대한 정치적 및 사회적 변혁이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의 지배로 귀착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청중에게 경고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그 자신이 로베스피에르의 존재와 그의 행위를 믿지 않고 있다면, 그의 논거뿐만 아니라, 진실성은 어떻게 되는가?”20

마태복음 19장 4~5절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 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에 관하여, 헉슬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

”창세기 2장 24절 말씀에 대한 신성한 권위가 없다면, 그 말은 얼마나 가치 없는 말인가?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인류의 타락 이야기를 하나의 ’유형‘ 또는 ’우화‘로서 아무렇게나 여길 수 있다면, 바울 신학의 기초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21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21~22절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에 관하여, 헉슬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

”만약 아담이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티탄족 영웅)보다 더 실존 인물이라 생각할 수 없다면, 또한 인류의 타락 이야기가 심오한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비슷한 한낱 교훈적인 ‘유형’이라면, 바울의 변증법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성경 말씀을 타협하고 있는(유신론적 진화론) 신학자들의 태도를 지적하면서, 헉슬리는 ”신학자들이 취한 (타협적) 태도가 옹호될 가망이 없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윈의 죽음과 웨스트민스터 사원

다윈이 죽자, 헉슬리의 주도 하에 다윈은 그의 고향인 다운(Downe)이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 묻혔다. 헉슬리와 그의 무신론자 친구들은 그렇게 하도록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캐논 파라(Canon Farrar)에 압박을 가했으며, 다른 친구들은 하원의 지지를 끌어냈다. 이렇게 해서, 헉슬리가 그렇게 경멸했던, 진화론과 쉽게 타협했던 자유주의적 성직자들에 의해서, 불가지론자 다윈은 종교적으로 숭고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게 되었던 것이다.

13년 후에 헉슬리도 죽었다. 몇몇 사람들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국장을 치룰 것을 제안했으나, ”헉슬리는 그러한 제안이 있을 것을 예상했고 그렇게 못하게 했다.”22 대신 그의 장례식은 일부 과학자와 무신론자 친구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향에서 조촐하게 거행됐다. 이러한 생각은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라는 말씀이 보통 사람들에게만 해당하고, 왕립협회 회원인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기를 바랬던 그의 간절한 생각들 중 하나였다.”23

헉슬리의 생애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1981년 미국 국립과학원(National Academy of Science)은 ”종교와 과학은 별개이며, 같은 문맥의 설명이 과학적 이론과 종교적 믿음 모두의 오해로 이어질 수 있는 인간 사고에 있어서 상호 배타적인 영역이다”라고 결의하고 있다.15 법학 교수인 필립 존슨(Phillip Johnson)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토마스 헉슬리의 생애는 이러한 난센스의 가장 좋은 대답이 되고 있다. 사실상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과학자들도 하나님의 문제와 늘 붙어있으며, 진화론적 자연주의(evolutionary naturalism)의 요점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여, 문 뒤에 남겨지도록 만드는 것이다.”15

헉슬리와 윌버포스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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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윌버포스

헉슬리는 영국과학진흥협회(British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의 연례 회의에서 옥스퍼드의 성공회 주교인 사무엘 윌버포스(Samuel Wilberforce, 노예 제도를 반대한 정치가인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아들)와 벌인 논쟁으로 인하여 오늘날 잘 알려져 있다. 이 논쟁은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7개월 후인, 1860년 6월 30일, 옥스퍼드 박물관의 도서관에서 700명 이상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헉슬리와 윌버포스는 논쟁에 앞서 ‘종의 기원’에 대한 논평을 기술했다. 헉슬리는 1859년 12월 26일 타임스(The Times) 지에 5,000 단어 길이의 과찬하는 기사를 발표했다. 수학과를 수석 졸업했으며, 열성적인 조류학자이고, 영국과학진흥협회의 부회장이었던 윌버포스는 1860년 7월, Quarterly Review 지에 18,700 단어 분량의 주의 깊게 논증하는 과학적 평가를 기고했으며24, 여기에서 그는 6페이지(239-245페이지)를 할애하여 한 종(species)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되는 어떠한 경우에도 지질학적 기록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 관한 윌버포스의 논평을 읽으면서, ”사고력이 대단히 뛰어나며, 대부분의 추측된 부분들을 정학하게 지적하고, 모든 문제점들을 잘 제기하고 있다.”라고 말했다.25

옥스퍼드 논쟁에서, 윌버포스는 종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논평을 요약하여 제시했다. 그의 연설은 ”무지, 편견과 종교적 감정이 아니라, (일반적인 표현으로서) 사실상 그 시대의 대중들이 다윈의 저서에 대해 품고 있었던 많은 과학적 반론들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26 ”그가 본 바와 같이, 또한 대부분의 청중들이 본 바와 같이, 이러한 논평은 (종의 기원이) 과학적 사실로서 왜곡되었음을 증명했으며, 이를 밝히고자 계속 효과적으로 발언했고, '또한 좋은 반응'을 얻었다.”27 그 후 헉슬리가 연설했으며, 이어서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FitzRoy, 다윈과 함께 항해를 했던 비글호의 선장)와 다윈의 친구인 조셉 후커(Joseph Hooker)가 발언했다.

이 논쟁에 관한 오늘날의 설명들 대부분은 윌버포스가 헉슬리에게 자신의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 중 어느 측이 유인원(ape)과 친척인지 질문했었다는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이에 대한 답변에서 헉슬리는 자기의 재능과 영향력을 중요한 과학적 토론을 조롱하는데 사용하는 인간보다는 차라리 유인원을 할아버지로 택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이 논쟁에서 이와 같이 알려진 언쟁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 보인다. 루카스(J. R. Lucas)는 Nature29에 개괄적으로 소개된 The Historical Journal28의 장문 기사에서, 이 이야기에 유리한 증거와 불리한 증거를 요약하고 있었다. 그는 청중이 하원 전체보다 많았기 때문에, 그 논쟁의 시끄럽고 다소 공격적인 분위기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발언 내용을 전부 들을 수 없었거나, 또는 발언 내용을 모두 정확하게 들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후커는 이틀 후 다윈에게 쓴 편지에서 이러한 점을 언급하지 않았다.30 당시 정기 간행물의 기자 보도에도 이와 같은 점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루카스는 ”아세니움(The Athenaeum) 지의 3개 기사와 잭슨 옥스퍼드 저널(Jackson's Oxford Journal)의 한 짧은 기사들이 있었는데, 이 기사들의 설명은 서로 달랐다. 그 어느 기자도 이렇게 놀랄만한 언쟁을 보도하지 않았으며, 그 언쟁의 엄청난 영향을 언급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다.31 마찬가지로 이브닝 스타(Evening Star) 지도 다음 날 그 논쟁에 관한 기사를 실었지만, 그와 같이 알려진 언쟁을 언급하지 않았다.32

옥스포드 논쟁이 일어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 공개된, 다윈의 지지자들이 쓴 다양한 형태의 편지들은 상당히 다르다. ”다윈이 아들인 프란시스(Francis)가 1887년 편찬한 ‘다윈의 생애와 편지(Darwin’s Life and Letters)‘에서 그 일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33,34 그 언쟁을 말한 그대로 옮겨놓은 설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헉슬리 자신에 의하면 그의 말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로서 보잘 것 없는 유인원과 선천적으로 고귀하게 태어났으며 뛰어난 영향력을 갖추고 이러한 능력을 이용하는 인간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나에게 질문한다면, 또한 중요한 과학적 논쟁에 웃음거리를 끌어들이려는 단순한 목적으로 이용한다면, 나는 주저함 없이 유인원을 더 좋아한다고 단언한다.”35 헉슬리는 자신에게 가상적인 질문을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만약 윌버포스가 실제로 그렇게 물어보았다면, 헉슬리는 분명히 ”주교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또는 윌버포스를 지명하면서, ”귀하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이라고 말해야 했겠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또한 윌버포스는 ‘할머니’란 단어를 언급하지도 않았다.

헉슬리의 자서전을 쓴 작가인 아드리안 데스몬드(Adrian Desmond)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논쟁은 서로가 상당히 다르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승자’를 가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헉슬리는 자신이 ”옥스포드의 논쟁에서 4시간 내내, 그리고 그 후 20시간 동안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었다고 믿었고, 후커는 ”여러 차례의 갈채 속에” 윌버포스를 결과적으로 ‘패배’시킨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고 생각했다. 혼란 속에서 정신이 없던 투사들은 윌버포스가 의기양양하게 떠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윌버포스는 ‘어떠한 악의’가 없었으며, 헉슬리를 제압했다고 확신했다.”36

이 논쟁에 대한 설명이 편향되고 왜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아마도 그 설명들로 말미암아, 역사는 이 논쟁을 일반인들이 진화론을 대중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전환점으로 보고 있다.

본 주제에 대한 최신 정보는 ‘헉슬리와 윌버포스의 논쟁 바로 보기(Huxley’s Debate with Wilberforce-Setting the record straight)를 참조하기 바란다.

참고 문헌및 메모

  1. Not to be confused with ‘Darwin’s Rottweiler’, a term coined by Oxford theologian Alister McGrath about Richard Dawkins. 텍스트로돌아 가기.
  2. C. Darwin to T.H. Huxley, 8 August 1860. Life and Letters of Charles Darwin, Edited by Francis Darwin, 2:123–124, D. Appleton & Co., New York, 1911. 텍스트로돌아 가기.
  3. Desmond, A., Huxley: From Devil’s Disciple to Evolution’s High Priest, Addison-Wesley, Massachusetts, USA, 1997, adapted from dust-cover and p. xvii. 텍스트로돌아 가기.
  4. ‘In his teens he taught himself German, eventually becoming fluent and used by Charles Darwin as a translator of scientific material in Germen.’ Thomas Henry Huxley, Wikipedia, en.wikipedia.org/wiki/Thomas_Henry_Huxley, 6 February 2008. 텍스트로돌아 가기.
  5. Ref. 3, pp. 34–35. 텍스트로돌아 가기.
  6. ‘His only degree 'qualifications” thus were honorary doctorates—from Breslau, Edinburgh, Dublin, Cambridge, Würzburg, Oxford, Bologna, and Erlangen’ received in his later years.’ Encyclopaedia Britannica 6:179, 1995. 텍스트로돌아 가기.
  7. Two papers by Huxley were published by the Linnean Society and one by the Royal Society. 텍스트로돌아 가기.
  8. See Grigg, R., Alfred Russel Wallace: ‘co-inventor’ of Darwinism, Creation 27(4):33–35, 2005. 텍스트로돌아 가기.
  9. Ref. 3, p. 266. 텍스트로돌아 가기.
  10. T.H. Huxley to Frederick Dyster, 30 January 1859, as quoted in ref. 3, p. 253. 텍스트로돌아 가기.
  11. Ref. 3, pp. 267. 텍스트로돌아 가기.
  12. C. Darwin to T.H. Huxley, 16 December 1859, More Letters of Charles Darwin, ed. Francis Darwin and A.C. Seward, John Murray, London, 1903, 1:131, Letter 85, as quoted in darwin-online.org.uk/content/frameset?itemID=F1548.1&viewtype=text&pageseq=1, 12 March 2008. 텍스트로돌아 가기.
  13. T. H. Huxley to C. Darwin, Nov. 23, 1859. Ref. 2, pp. 26–27. 텍스트로돌아 가기.
  14. Blinderman, C. and Joyce, D., The Huxley File, #4 Darwin’s Bulldog, aleph0.clarku.edu/huxley/guide4.html, 12 March 2008. 텍스트로돌아 가기.
  15. Johnson, P.E., Thomas Huxley, A Pioneer in a Still-Raging Scientific Debate, Washington Times, 4 January 1998, p. B8. 텍스트로돌아 가기.
  16. Ernle, Quarterly Review, ccxxxix, (1923), 224, as quoted by Himmelfarb, G., Darwin and the Darwinian Revolution, Chatto &Windus, London, p. 217, 1959. 텍스트로돌아 가기.
  17. Huxley, T., Science and Hebrew Tradition, Vol. 4 of Huxley’s Collected Essays, ‘The Lights of the Church and the Light of Science’, (1890), pp. 207–208, aleph0.clarku.edu/huxley/CE4/Lights.html, 18 March 2008. 텍스트로돌아 가기.
  18. Ref. 17, p. 214. 텍스트로돌아 가기.
  19. Ref. 17, p. 225. 텍스트로돌아 가기.
  20. Ref. 17, pp. 232–233. 텍스트로돌아 가기.
  21. Ref. 17, pp. 235–236. 텍스트로돌아 가기.
  22. Ref. 3, p. 611. 텍스트로돌아 가기.
  23. Ref. 3, pp. 612–613. 텍스트로돌아 가기.
  24. Wilberforce’s Review of the Origin of Species is available at usp.nus.edu.sg/victorian/science/science_texts/wilberforce.htm (last accessed 14 May 2010), 26 March 2008. 텍스트로돌아 가기.
  25. C. Darwin to J.D. Hooker, July 1860, ref. 2, pp. 117–118. Return to text. 텍스트로돌아 가기.
  26. Gauld C., Update: The Huxley-Wilberforce Debate, [An analysis of 63 books on the subject.] Ships Resource Center, www1.umn.edu/ships/updates/wilbrfrz.htm, 13 March 2008. 텍스트로돌아 가기.
  27. Lucas, J.R.,Wilberforce and Huxley: a Legendary Encounter, The Historical Journal 22(2):319, 1979. 텍스트로돌아 가기.
  28. Ref. 27, pp. 313–330. 텍스트로돌아 가기.
  29. Lucas, J., Wilberforce no ape, Nature 287:480, 9 October 1980. 텍스트로돌아 가기.
  30. Bowlby, J., Charles Darwin: A New Life, W.W. Norton & Co., New York, pp. 354–55, 1990. 텍스트로돌아 가기.
  31. The Athenaeum, nos. 1705, 1706, 1707, 30 June, 7 July, 14 July 1860; Jackson’s Oxford Journal 7 July, 1860. Quoted in ref. 27, p. 315. 텍스트로돌아 가기.
  32. Ref. 30, pp. 358–59. 텍스트로돌아 가기.
  33. See Blackmore, V. and Page, A., Evolution the Great Debate, A Lion Book, Oxford, UK, p. 103, 1989. 텍스트로돌아 가기.
  34. One source is Mrs Isabella Sidgwick, writing as ‘Grandmother’ in Macmillan’s Magazine 78(468):433–434, October 1898, i.e. 38 years later. Available in ref. 27, pp. 313–314. 텍스트로돌아 가기.
  35. T.H. Huxley to F. Dyster, 9 September 1860, quoted in ref. 3, p. 279. 텍스트로돌아 가기.
  36. Ref. 3, p. 280. 텍스트로돌아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