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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은 죽음과 고통을 허용하시는가?

저자: 조나단 사파티 박사 (Dr Jonathan Sarfati)
번역자: 김정화 (Christina Jung Hwa Kim)

죽음과 고통의 문제

테러리스트들이 뉴욕 Twin Towers에 2001년 9월 11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3000명의 인명사상을 낸 사건이 있다. 많은 이들은 왜 선하신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그러한 일들이 자행되는 것이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역사상에 행해졌던 대참사에 비할 것은 못되더라도 나치 연맹1 하에 있던 진화론적 정권은 수많은 유대인과 다른 민족의 생명을 앗아갔다.

수년간, 자연재해들을 몰고 온 여러 원인들로 인해 있었던 참사들은 다만 자연현상으로 보기에 는 어려운 것은 예를 들면 9.3 강진 이후에 밀려드는 대형 쓰나미 (인도네시아 서쪽 근방 ) 가 2004년에 14개여국에 이르러 230,000명이 사망에 이르렀다.2

더 큰 재앙들이 과거에 보다 확산되어져 갔는데 예를 들면, 14세기에 검은 죽음 (bubonic plague) 이 유럽에서 75-200 백만명을 사상 자에 이르기도 했다. 스페인 독감이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이르러 50백만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 다.

천성적 장애요인들이 듣는 능력과 시야를 상실하게 만든 헬렌켈러의 이야기는 그의 불우하였 던 성장 시기를 반영하기도 한다.

우리는 전부 다 개개인으로서의 질병, 사고 그리고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난관들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랑의 근원 가치이신 하나님을 생각 해 볼 때 왜 그러한 고난과 고통 그리고 사망의 섭리를 거두지 않으시는가 반문하게 된다. 이러한 고통의 문제들은 무신론자들이 근본적으로 묻게 되는 성경에 대한 반론이면서도 더 정확히는 창조주에 대한 회의론적 반격이다. 그들에겐 답이 필요하다!3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데는 고통의 문제가 있다.

슬프게도 다수의 이들이 –심지어 많은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죽음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는 알고자 하려 하 지 않는 이유가 근원적인 답을 알 수가 없다고 회피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연대인 수백억 만년이 나 몇백억 만년의 세계관으로는 고통이나 고난을 통해서도 목적을 이루는 삶을 발견 할 수 있다 는 창조주의 섭리를 알아가는 데는 자가당착적인 요인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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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ie Darwin

Charles Darwin (1809-1882) 은 그의 딸의 사망 소식을 접한 후 기독교를 거부하기로 결단했다. “ Annie의 처참한 죽음은 그 아버지의 세계관 뿐만이 아니라 윤리적 모태까지도 갈기갈기 찢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가 기독교에서 자신을 파기하기까지는 이 힘든 고통의 문제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4

그리하여 그 자서전에 나와 있는 대로 무신론자가 되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종의 기원이라는 저서에서 고통과 죽음이라는 관제에 대해서 반기독교적인 무신론을 기반으로 한 역사의 기원을 다루고 있다.5 Darwin은 현대사에서 보여진 전쟁이나 기근과 사망의 참상을 생각할 때 죽음이 그의 진화론적 세계관으로 볼 때 마지막이라고 단정한다.6

Richard Dawkins (1941- ), 저명한 무신론자이기도 한 그는 동물의 고통을 하나님이시자 창조주이 신 그 분께 반기를 드는 변론의 이유들로 대기도 한다.7 ‘Darwin’s Bulldog’에서 불가지론자 T.H.Huxley가 지적했듯이: “우리가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인류적 고통에 반응할 수 있는 끊임 없는 관심과 격려가 있다면 우리에게 있는 두 귀는 벌써 소멸되고 없을 것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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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Templeton (1915-2001), 유명한 부흥사이기도 한 그는 그의 역서 Farewell to God9,10 에서 쓰기를 어떻게 그가 기독교를 저버리고 자유신학을 표방하게 된 데에는 엄청난 고통의 문제가 다가 왔을 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다는 믿음과 그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부정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는 “견디기 어려웠던 고통 안에서 모든 삶의 지표가 죽음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육식동물은 다른 먹이감을 찾아 돌아다니며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가시는 찌그러뜨리거나 살을 찢기 위해 만들어진 이빨, 움켜지고 찢기위해 만들어진 발톱, 마비 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독, 피를 빨아들이기 위한 입을 틀어막고 질식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이빨을 가진 창조물”을 말한다. 그는 “자연에 대한 테니슨(Tennyson)의 생생한 문구인 ‘빨간 이빨과 발톱’을 통해 인생은 피의 축제라고” 말한다. 이 약육강식의 생존 원리는 무시무시한 맹수가 날카로운 이로 습격을 해서 잡아먹고 사는 피를 말리는 정글의 법칙은 그다지 창조주가 과연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회의를 들게 한다.11,12,13

우리는 템플런(Templeton)의 질문에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 지를 볼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일반적 견해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까지도 죽음에 대한 멘트는 삼가는 것이 예의가 맞다. “ 그 분은 인생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정도로 정석의 삶을 사신 것 같아.” 라고 종종 위로한다. 그러나 역시 죽음은 여전히 우리를 비껴갈 수 없다는 사실에 수긍할 따름이다. 건강한 육체적 불멸의 기회가 있다면야 누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갑작스런 자녀의 죽음이 공평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부모가 5살 때가 아니고 21세나 75세에 나의 자녀를 데려가시면 않되었을까? 어린이들의 죽음은 특히 ‘잘못된’ 것처럼 보이지만, 만약 우리가 신에게 어린이들의 모든 죽음을 막으라고 요구한다면, 왜 거기에 선을 긋는가? 또한 이러한 인간이 저지른 만행과 많은 사상자나 인명피해를 내는 재난과 같은 자연 재해의 양면에는 그것을 초래하게 한 우리들의 책임도 피할 수 없다는 얘기다.

수십억명이나 되는 죽어간 이들의 모습을 인류의 밝은 미래로 보기 에는 극히 어렵다. 그저 한 방울의 물방울 뿐이다. 그리고 70억명의 수가 되는 모든 지구상의 사람들이 기적이 나타나길 바라며 죽음과 싸우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과연 우리가 생명의 연장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신 그 무엇으로 대신 할 수 있겠는가?

무신론자들의 견해: 그들만의 가치인가?

무신론자가 기독교의 신이 ‘악하다’고 불평하려면, 그는 그를 심판할 선악의 기준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단지 진화한 연못 쓰레기라면, 일관된 무신론자들이 믿어야 하는 것처럼, 옳고 그름의 객관적인 기준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도킨스(Dawkins)은 말하기를, “우리가 관찰한 우주는 .. 설계도, 목적도, 악도, 선도 없는 맹목적이고 무자비한 무관심 뿐이었다.”14

이렇게 선과 악의 기준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고 멸시받는 멸망의 시대에 단순히 이 시스템 하에서 옳고 그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단지 뇌의 화학적 작용의 산물일 뿐이어서 원숭이 같은 조상만도 못하게 인간들을 행동하게 조장하고 있는 이러한 세상에서 과연 생존이라는 일개의 일념이 아니라면 무엇을 그들에게 바랄 수 있겠는가? 또한 한 마리의 개구리가 수천 마리의 파리 떼를 죽이는 것 보다 테러리스트들의 뉴욕에서 빌딩 격파로 희생된 사상자들의 죽음이 어찌 비교가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변론을 끊이지 않고 그 악의 범주를 이미 넘어선 결과로서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반론으로 살아갈 뿐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법을 준행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 이유는 성경에 도덕적 기준과 관습적 행함의 모범들이 캐논으로서 적혀있기 때문이다.15

무신론적 주장이 요약되어있다.

무신론을 맹목적(표방)으로 따르거나 선전하는 이들에게는 논리적인,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어떠한 것도 그들에게는 가치없는 변론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교도인 그리스의 철학자 Epicurus (341-270 BC), 이 후에 기독교 변증학자 Lactantius (AD 240-320),16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계몽’ 회 의론자 David Hume (1711-1776)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 본론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 분은 전지 전능하시며 아무런 흠이 없으시로다.
  2.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모든 악을 없애버리지 않을까?
  3.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면 그는 악이 언제 존재하는 지 아신다.
  4.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완벽하시다면 그는 모든 악을 제거하길 원하실 것이다.
  5. 악은 존재한다.
  6. 만약 악이 존재하고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모든 악을 제거할 힘이 없거나, 언제 악이 존재하는 지 또는 모든 악을 제거하고자 바라지도 않는 것이다.
  7.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첫번째 전제는 성경에서 나오듯이 유대-기독교 신의 속성을 설명한다. 전제 2-4장에서는 유대-기독교 신이 그러한 속성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타당하게 여겨지지만, 반면 전제 5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리하여 반유신론자론자들이 하나님이 성경에서 나타나는 대로 계시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6) 그리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7)

#1을 다시 재고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부정함으로 예를 들면 ‘개방유신론’과 ‘과정신학론’을 언급함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전개되는 반론

기독교적 철학사에 있어서 어떤 이들은 #4가 더 변론되어야 함을 주장 해 왔다.

4’ 하나님이 꼭 필요해서 허용하지 않는 한 만약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완벽하시다면 그는 모든 악을 제거하시길 원하실 것이다.

그러면 #5라는 동떨어진 구별된 것이 된다. 어떠한 반유신론자도 악을 허용하는 어떠한 선한 이유도 없다는 결론을 냄으로서 유신론이 거짓임이 밝혀지게 된다.

하나님의 악을 허용하심은 인류의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것이다(p.11). Apologists=옹호자들은 여기서 그들의 변론들이 또한 더 한가지 헛된 것임을 잘 알려주고 있다.

악 의 존재는 이미 #4과는 맞지 않는다;

4”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완벽하시다면, 그는 모든 악을 없애시길 원하실 것이다. 그는 악을 가까이 할 수 없기에 악과 존립할 수 없다.

그러나 사실인가? 하고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왜냐면 우리 안에는 악이 존재함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악을 제거하시려면 그가 우리 모두를 없애셔야 한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5는 다음과 같이 고쳐질 수 있다.

5’ 지금부터 영원히 악은 멸하여 질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성경에 기록됨) 그러나 다만 아직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만민에게 이르지 않았을 뿐이다.

1, 4/4’,5’는 하나님에 관한 맞는 설명들이다.

이것은 놀랍거나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아니지 만 여전히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실재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악의 근원이 무엇인지 왜 악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며 무엇을 이미 하셨고 또한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하고 계신 지 설명 할 필요가 있다.

악은 어디에서 왔는가?

하나님이 완전하사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심히 좋았다” 라고 하셨다. (창세기 1:31). 사실상 악의 존재는 증명할 수는 없다. 또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자 어거스틴이 지적했듯이 어떤 것이 있어야 할 선의 박탈이다. 살인죄와 같은 다른 사람 의 목숨을 앗아가는 악을 행하는 범죄이다. 간음죄는 가정을 파괴한다. 선은 모든 것의 기본이며 자체로 악과 맞서지 않아도 된다. 악은 선한 모든 것에 있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가치들을 앗아가고 파괴시킨다.

악은 인체와 같은 여러 기관들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상처는 몸과 분리되어서 생겨날 수 없으며 상처에 대한 개념은 건강한 신체라는 개념을 전제로 한다. 장님이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분명히 악이며 인간이 볼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고 ( 그러나 굴은 악이다. 그래서 장님은 굴에 대해서 악이 아니다.) 그래서, 악은 보이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지 않으셨다.17

이러한 악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물체 – 이른바 동물과 식물을 이름하게 하사 아담에게 다스리게 하신 그 준엄한 명령 안에 있다. 특별히 사람들과 동 물들은 초식을 해 왔는데 (창세기 1:29-30) 그 곳은 폭력도 고통도 없었다. 이사야 11장 6절-9절 그리고 65장 25절도 미래를 이러한 아름다운 에덴 동산처럼 바라 볼 수 있게 한다.18,19 이 본문들은 사자와 소, 늑대 그리고 양 그리고 해롭지 않은 독사에 관한 인용들 이다. 두 본문들이 보여주는 이상적인 세계에 대해 알 수 있다. : “누구든지 다치게 하거나 파괴하지 마라.” “아무도 해악하지 말라” 이러한 경고는 다만 “심히 좋았다”라고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게 되어있는 우리는 그 분의 피조물로서 동물의 생명을 해치고 파괴하는 것이 “매우 좋은” 창조물의 일부가 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능력 VS 사단의 죄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사 천사들과 함께 반역의 죄를 저지르게 하셨는데 그것은 자유의지로 하나님께 반대하는 결정을 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죄와 분리되어야 하시는 성결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러한 역선택의 힘을 가지지 않으신다. (하박국 1:13, 요한일서 1:5)

역선택의 힘은 실제 악이 없는 선이었지만 악의 가능성을 의미했다. 분명히, 하나님은 그것으로부터 더 큰 선한 것이 나올 거라고 보셨고 그 결과 하나님을 자유롭게 사랑하는 피조물들이 나오게 될 거라 여기셨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자유의지로 되어져야 한다. 만약 내가 컴퓨터에 ‘사랑해’를 띄우도록 프로그래밍했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와를 신령으로 예배 하는 자에게 상급을 주시는 자요 이것이 명백히 드러나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특권이요 참된 자유이다.

그러나 아담이 이 선을 남용한 것(창세기 3장)은 -선한 것 자체가 아니라 – 실제로 악이 그와 나머지 물질적 창조에 닥치게 했고, 나머지 물질적 창조는 그가 그것을 지배했가 때문에 일어났다. (창세기 1:28)

아담의 죄와 그 결과들

창조주간 (6일 창조)이 얼마되지 않은 후에20 이브가 뱀의 유혹에 금지된 과일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어서 뱀에게 속지도 않았지만 결국은 먹게 되었다. (1 디모데전서 2:13-14)

그 죄는 인류의 원죄가 되었고,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죄의 결과들을 낳게 되었다. (로마서 5:12 ff), 그리고 그들은 역선택의 힘을 잃었다. 그러나 이 경우, 그것은 이제 그들이 더 이상 그들의 죄성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시 편 51:5, 예레미야 17:9, 로마서 7:15-25) 오늘날 사람들이 죄를 계속해서 하나님께 행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죄성이기 때문에 구원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실제가 아닌 악의 잠재력은 선악지식의 나무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암 담당 전문의가 암에 대해 아는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악의 근원까지도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알고 계시는 분이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은 후, 그들은 암환자들이 암을 아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악을 알았다. 그것은 슬픈 개인적 경험이다.

영생에 이르러(p.25) 구원 받은 인류는 죄에 대한 구속력을 잃는다. 구원은 에덴의 동산보다도 더 새로워진 지상낙원에서 사는 것처럼 행복한 상태에 이른다.

자유의지와 악의 문제: 기독교 변증론

자유의지는 종종 기독교 변증론에서 악의 문제에 결부되곤 한다.21 그러나 성경의 설명은 더 미묘하다. – 아담과 이브에게만 적용되는 ‘자유’, 그들의 죄로 인해 그들이 창조될 때 부여 받은 진정한 자유를 잃었다. 그래서 후손들은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 죄에서 고통받게 되었다. 오직 영생으로의 길이 구원이요 죄의 삯인 사망으로부터 끊어짐이다.

그러나 고의로 9-11 사태와 같은 테러를 행한 것은 바로 사람들, 인간이다. 이러한 어려움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변론들과 함께 행해지는 악의 결과이지만 그저 목도만 할 수 없는 비극의 참상이다. . 그러나 사실, 인간은 자발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고, 9-11 테러 공격을 포함한 매우 많은 악폐가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다. 신이 이런 종류의 악에 대항하여 개입하기 위해서는, 그는 이 의지를 제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위반을 없애야 하는가? 그리고 무신론자는 이 해결책에 정말로 만족할까? 논리적으로 무신론적인 생각을 할 때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그를 때리는 신의 권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악의 문제

도덕적 체계는 그 법적 조치에 관하여 Darwin, Templeton, Dawkins의 양육강식이론에서 근본적인 해법이 없으며 더 타당한 답으로는 성경적 역사관이 필요하다. 아담의 죄 이후에 무엇이 일어났는 지에 대해서 말이다.

죽음과 고통은 죄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한 가지의 불문계명을 주셨는데 그가 어길 시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2:17) 하나님은 그 자신의 말씀을 지키고자 아담을 심판하사 죽음에 이르게 하신다. (창세기 3:19) 이는 죽음이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방식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오는 침입자임을 보여주는 첫 번째 표시다. 신약은 사망을 “마지막 원수” (1 고린도 전서 15:26) 그리고 ‘죄의 대가’ (로마서 6:23)라고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망에 이르는 것은 죄이며 그것은 하나님과 분리 된다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하나 뿐인 아담을 죽인 결과도 하나님이 맡게 되었다. –그는 동물을 죽여 아담과 이브에게 옷을 해 입혔다. (창세기 3:21) 그 결과로 하나님이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심판의 결과 아래 인간을 두셨다 – 사망과 악의 권세

이제 성경은 아담이 인류의 우두머리였고, 우리 각자와 그의 후손들을 대표한다고 말한다 바울이 서신서에서 재차 반복하듯이 바울이 성경에서 언급하듯이 (로마서 5:12-19) 우리는 ‘아담’ 으로써 죄를 짓고 아담과 같은 죄성의 문제가 있다.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모든 인류가 아담의 모형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 살기를 원한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생명을 주신 분이시니 죽음은 하나님 없는 삶을 선택하는 당연한 형벌이다.또한 주님은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시니 반역죄에 대한 벌이 있어야 했다

성경은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아담의 죄 뿐만이 아닌 우리의 죄가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5:12) 다른 이들의 죄를 볼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죄를 주께 고백하라 왜냐하면 죽음과 고통 속의 문제들이 모두가 죄와 관련이 있기도 하다. 우리에게도 잘못되어져 가는 세상만 탓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아무도 ‘결백하다거나’, ‘죄가 없지’ 않다.

더욱이 인류의 세상을 다스림은 (창세기 1:26-28) 아담이 죄를 지어 만물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인류의 타락을 말하는데.22,23 로마서 8장 22 절에서 말하듯 “ 온 만물이 슬피 울고 잉태하는 소리에 신음하며 아파하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물을 헛되이 하셨기 때문이다 (v.20)24 이것이 왜 살아있는 세계가 '전쟁 중'인지 설명해준다.

하나님께서 죽음으로 죄악을 판단하셨을 때 그분의 능력 일부를 거두어 가셨노라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거두어 가셨다면(골로새서 1:16-17) 창조는 사라지리라) 죄 때문에 모든 것이 고갈되고 있다. 성경은 예를 들어 40년 동안 떠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신발이 나머지 창조물처럼 닳지 않았을 때(히브리서 1:10-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지키는 세상을 엿볼 수 있다

다니엘 3장에서는 불타는 성령 안에서 춤추고 있는 세 명의 친구들을 보면 천지 창조의 계시를 빛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예시한다. 죽음, 고난, 질병 등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통치에 위배된 것일 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신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 즉 하나님 없는 삶에서 비롯된다. (비교.로마서 1:18-32)

올바른 답

이러한 질의 방식을 도입한 사람은 유명한 기독 변증가 Norman Geisler (1932- ) 이다. Templeton의 ‘자연주의의 폐악’ 그리고 자연계의 폭력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은 동물들을 실낙원에서 마냥 먹혀두게 하지 않으셨으며 서로 공존했지 서로를 먹이로 삼지는 않으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미래에 하나님께서 “새 땅과 새 하늘을 여셨으니” “ 늑대와 양이 서로 풀을 뜯어 먹으며 사자는 황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다 “ 다른 말로 말하면, 이러한 죽임의 실상의 모습들은 없어질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셨을 때 그 모든 것이 좋았더라. 인간의 타락이 이러한 결과들을 불러왔다. 신이 사실상 떠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부분적으로 떠났다. 로마서 8장은 식물, 인간, 동물 등 모든 창조물이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로마서 8장) 예를 들어, 인간의 수명이 급격히 감소했고 (노아의 방주 창세기 11장25,26) 하나님의 계획은 선하신 것이었다. 인간의 죄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이것 또한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 안에 회복과 구속의 역사가 있게 되는 것이다.27

이것은 채식주의 동물들이 어떻게 육식성이 되었는지에 대한 좋은 요약이다. 그리고 이로운 박테리아가 해로운 박테리아로 되는 지의 과정을 보라.28

왜 수백억년의 장구한 연대가 틀린가

가이슬러(Geisler)는 수십억 년의 지구 역사를 믿지만, 그의 대답은 성경적인 (젊은 지구) 틀에서만 작동할 것이다. 수십억 년은 성서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암석층을 형성하기 위한 추정된 시기로부터 논의된 것이다. 이제 그 과학은 심각한 결함이 있고 다른 곳에서 반박되었다.29여기서 주목할 점은 Geisler가 발견한 대로 화석들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죽은 화석체 까지도 말이다. 이러한 죽음을 아담의 죄 이전으로 그 시기를 정해 놓음으로 성경의 죄가 사망을 낳는다는 진리에 위배된다.

인간의 죽음

죄 앞에 놓인 동물의 죽음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인간의 죽음은 아담의 죄에서 시작됐다고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고려해 보자면:

  • 로마서 5:12-16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를 말미암아 사망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까지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 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 하나님 은혜 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 고린도 전서 15:21-22. 45-47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이러한 “첫번째 사람, 아담”의 불순종이 인간의 죽음을 야기시켰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죽음이 예수님의 순종과 부활로서 연결되어 “두번째 사람” 그리고 “마지막 아담” 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30,31

Geisler는 아담 이전에 인간 화석들이 연대 측정 방법에서 시간의 공간이 존재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195,000년 전에서부터 방사성 동위 원소는 그 연대 측정에 있어서 두 개의 호모사피엔스 골을 발견했다고 전했다.32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류의 조상은 아담 이며 성경적 연대기의 어떠한 면을 보아도 타당치 않음을 알 수 있다.33,34— 기원과학의 시 류 더 심한 것은, 식인의 증거가 화석에 남아 있으며35 아담보다 훨씬 앞서서 말이다. 그래서 인간 화석들조차 성경적인 사실들을 포괄할 수 없다. Geisler가 보여준 답은 제시된 수백억년의 연대와 일치하지 않음을 알게 한다. 성경의 진리에 반거하는 이러한 거짓 이론-수백억년의 연대으로 현혹되지 않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되어야 겠다.

동물의 죽음

Geisler는 육식활동이 아담의 타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은 맞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에 대한 동일한 문제는 동물의 죽음에 대해서도 확대된다. 예를 들면, 화석 기록에 의하면 도마뱀과 함께 발견된 칠면조 크기의 콤프소그나투스(Compsognathu)가 도마뱀의 배36에 있는 것과 유명한 벨로키랍토르(Velociraptor) 가 계속적으로 프로토케랍톱스(Protococeratops)와 사투를 벌이다가 화석에 나타난 것을 찾을 수 있고, “티렉스 코프로라이트T.rex coprolite(화석분변)은 뼈 성분의 높은 30-50% (고밀도)를 보여주고 있다.37” 우리는 또한 화석 기록에서 종양들을 찾을 수 있다.38

Geisler의 변론이 맞는다는 주장이 6000년대의 성경적 연대기에 근거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 과정은 또한 아담의 타락 후에 있게 된 화석들에 대한 논리정연한 설명은 창세기 6장에서 9장의 노아의 날에 대홍수에 나와 있다. 그리고 난 후 바벨탑 사건이 있었고 인간 화석들이 있게 된다. (창세기 11장)39

미래에 대한 성경적 해석: 회복

죽음과 고통이 수백만 년 동안 계속돼 왔다는 시각과 달리 이 성경적 역사관은 미래에 대한 놀라운 시사점을 갖고 있다. 사도행전 3장 21절에 의하면 세상은 폭력도 죽음도 없는 상태로 회복될 것이다. 만약 이 오랜 과거가 모든 죽음과 고통을 수반하는 현실이었다면, 이 가르침에 문제가 있다. 무엇에 관한 ‘복원’인가? 수십억년의 더 많은 죽음, 고통 그리고 질병에 관한 것인가?40,41

이것으로는 해답을 구할 수 없으며 이 미래의 상태는 한 때 잃어버린 낙원을 반영하는 것이지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신기한 땅이 아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고난’에 있을 때.

성경은 고통은 죄를 수반하는 ‘큰 그림’의 일부라고 가르치지만, 고통의 개별 사례가 반드시 개인의 특정 죄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극심한 고난은 성경 속의 인물 욥을 통하여 알게 하시는데 욥기 독자들은 욥이 결코 보지 못한 천국에서 일어난 놀라운 ‘비하인드’ 사건들에 대해 듣게 된다. 주님은 욥의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었지만 욥에게 이런 이유를 말씀하지 않으셨고 욥에게 그 이유를 묻지 말라고 요구하셨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태생으로 눈이 먼 자를 지날 때 그 죄가 그의 부모나 그의 죄 때문인지를 물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무의 죄가 아니리라. 예수님께서 그 맹인을 고치시며 말씀하시기를 그의 맹인이 된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남이라. (요한복음 9:1-7)

비록 죄 씻음과 같이 병 나음이 되지 않더라도 그것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죄나 믿음 이 부족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 또한 그 병이 나음을 받고자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다고 전한다. “내 은혜가 족함이라 나의 힘은 나약함 속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많은 장애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지침과 아픔 그리고 증오들이 깨끗이 나음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풍요로우신 그 은혜를 넉넉히 부어주사 새 생명 얻게 하시는 보혈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누가복음 13장 4절은 예수님의 이러한 현대적 참상에 대해서 또한 경고하신다. 예) 9/11 테러에서 사람들이 빌딩에 파묻혀 죽어가야 했는 지를 예수님께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비유하신다. “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 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개인적인 죄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여러 고난 중에 있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정녕 회개하지 않으면 당신은 결코 영생을 얻고 복을 누리지 못하리라” 아무도 죄가 없지 않으며 완전한 이는 없다.42 우리는 전부 다 죄인이었다가 죄의 결과인 사망으로 저주 받았던 이들이니.

어느 부자와 나사로는 고통의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준다. 성경은 결코 고통과 고난의 문제에 대해 침묵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에도 불구하고 이러 한 우리들의 죄들을 심판하사 그 분의 사랑하심을 선포하셨다. 누가복음 16장 19절에 서 31절까지 나오듯이 이 땅에 오시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이 세상에 허다한 고난과 고통을 이해하는 길이다.

믿음은 있으나 거지 행색이었던 나사로에게 욕심많고 사악한 부자가 아프고 테이블 밑 에서 주어 먹고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이 공평하지는 않다고 여길 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에 쓰여 있듯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부활은 영생이 요 마지막 날에는 심판이 이르나니.43

성경적 관점: 고통의 문제

사도 바울은 “ 약한 데 강함이라” 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어려움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임을 말한다. 그는 매를 많이 맞았으며 감옥에 갇혔으며 돌에도 맞았으며 배가 도중에 파선되기도 했으며 강도를 당했으며 많이 지쳐서 힘들었으며 굶주렸으며 물이 없어 목이 마를 때도 있었으며 혹한에 시달렸으며 마침내 그 또한 순교 당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고난을 담은 편지들을 통해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부활은 고린 도전서 15장 14절과 19절에서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그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실체는 극히 불쌍할 뿐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성도들의 환난과 핍박들에 대해 필자는 5가지의 상을 주시는 것을 다음과 같이 필자하고 있다. 우선, 그 뜻을 살펴본다면:

  1. 고난은 우리들을 강건케 하사 완전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참예함으로 욥은 성경을 통하여 그가 받은 고난과 시험을 통해 나를 정금과 같이 단련하사 (욥기 23:10) . 하나님은 예수님의 인생 또한 우리들이 배울 수 있게 완벽한 인격체의 선생님으로서 알게 하사 성경을 통하여 그 분의 삶을 조명하게 해준다.“단순히 인간이셨다면 불가능한 완벽한 사역을 이루신 것은 그 철저한 순종하심이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달게 받으심이요 성경과 구원, 영생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있음이다” (히브리서 5:8-9)
  2. 그리스도에게로 가까이 다가감은 고난 또한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예수님은 애통해 하는 자요. 복음을 위하여 씨앗을 뿌리는 자들의 눈물을 아시는 분이다. 그 사랑의 표현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요. 우리는 어려움을 겪게 될 때마다 십자가를 기억하며 기도하게 된다. 그 고난을 넘어선 희생과 자비는 감히 측량할 수 없다.
  3. 고난을 겪은 후에 성도들은 예수님께 나아가 섬기는 법을 배우게 된다. 히브리서 2:8에 의하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을 통해 고난을 극복하게 하여 신앙생활에 힘쓰게 한다. 고린도후서 1장 3절에서 4절까지는 “위로의 하나님”에 대해서 간략히 소개되고 있으며 그 자비로우심에 대해 말하는데 그로인해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로할 수 있도록 한다.
  4. 고난은 천국의 영광에 이를 때까지 주의 또한 함께 하심과 천국에서의 더 큰 영광 준비케하신다. 사도 바울은 많은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음을 “ 우리가 잠시 받을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린도후서 4장 17절) 고난은 언제 다가올 지 모르는 그 크신 영광 속에 있는 것이다.
  5.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을 완성시킨다. 이 주장은 얼핏보면 이상하다고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해 고난 받으심으로 –과거 그리고 미래의 관한 그래서 우리의 고난이 그가 당하신 것을 채우게 하신다. (골로새서 1:24)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데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의 영광에 더해지도록 말이다. 이러한 것에 쉽게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최소한 하나님께서는 고난들에 대한 명백하게도 대단하고 놀라울만한 이유가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의 죽음과 고난에 대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

사람들은 하나님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저 관심을 끄는 어떤 대상으로나 여기진 않는 지 서로들 의아해 할 때가 많다. 하나님은 그들에게는 무능력한 존재일 뿐 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벌써 많은 축복들을 당신을 통해서 알게 하신다.

예수님의 험난한 십자가 사건44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과 용서의 의지를 굽히지 않으셨다. 아담의 죄는 인류에게는 크나큰 죄악이었다. 우리들의 육체가 죽어서 갈 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음으로 그래서 우리는 육체적인 죽음에서 살아남는 비물질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다.

(마태복음 10:28, 빌레몬서 1:21-23, 요한계시록 6:9-11) 우리의 의식적인 존재는 영원히 살 것이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말씀하시고 용서하지 않으셨다면 아담의 죄가 우리 인류의 것으로 영원토록 그 사망의 삯을 하나님과의 분리라는 끔찍한 고통이요 비극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화해해서 영생의 축복과 구원의 감격을 받는 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 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능력을 믿는 것이며 이것이 예비된 그리스 도인의 삶의 시작이다. 레위기 17:11은 이렇게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심으로 신약에서 우리를 속량케 하심을 알게 하신다. “육체의 생명은 피이라 “ 피는 생명을 일컽는다. 신약에서는 “피흘림이 없이는 죄의 용서도 없으니 “ (히브리서 9장 22절) 왜냐하면 우리는 피와 살로 만들어졌으며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

에덴 동산에서는 하나님이 동물을 죽여 아담과 이브의 옷을 입혀 그들의 죄를 덮어 주는 장면이 있고 피의 제사가 죄를 없애기 위해 필요했다. 이스라엘에서는 동물의 제사를 드려 이 정결법을 거듭하게 한다. 히브리서 7장 27절,9장 9절, 25절에서는 이러한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왜냐면 구원과 속량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삼위일체의 두번째인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성령님 (삼위일체 중 세번째) 에 의해 잉태하셨으며(, 갈라디아서 4:4 이사야 7:14 마태복음 1:23, 누가복음 1:34, 누가복음 1:35) 지금까지도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나 환난 을 당하거나 복음을 전할 때마다 성령님께서 탄식의 기도로 우리를 통한 하나님 의 사역을 알게 하사 능력을 부어주신다. 또한 모든 유혹과 시험을 물리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십자가를 통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섬기게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인간의 형상으로 오셔서 그 완전함을 이루셨다. –죄를 구속하여 의를 이루심. 우리의 창조자 되시고 구주로서 성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 이렇게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셨다. (요한복음1:1-14)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아담의 후손에서부터 마지막 아담 에 이르기까지 죄없다 여김을 받게 하신다. ( 고린도전서 15:45) 그리고 여러 죄와 유혹에 맞서고 있는 우리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흠이 없이 비둘기 같이 순결하여 영원한 언약의 제물로 바쳐지기까지 그 완전한 사역을 마치시게 되셨다.(히브리서 4:15)

인류의 최초 조상인 아담은 죄악과 사망의 권세가 관영한 지금 세대를 본 받지 말라는 기독교의 핵심-예수 그리스 도 “마지막 아담” 구속자 되신 분을 닮아가기를 촉구하고 있다, 어떠한 이도 다 른 이들을 위해 대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할 길은 없다. (히브리서 7:27) 그러나 여기서 주목 할 점은 예수는 완전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두번째 사람 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형상으로 이 땅에 오시사 우리들의 죄들을 담당 하시고 울부짖으시매 “주여, 어서 들으소서!” 하시는 세번째 사람되신 성령님의 오심을 들으신 듯 하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들의 울부짖는 기도들과 애통해함을 절대 져버리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비록 그가 알 수 없을 지라도 우리들의 회개함과 애통해 함 마저 들으 시사 죽음과 고난을 겪게 되는 우리 못난 인간들의 편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화해의 영이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듯이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으리라는 성구는 하나님 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생애 앞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그 이름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라. 그리고 사망 권세를 능히 이김이니라. 영생은 오직 믿음으로만 말미암이니 (요한복음 1장 12절, 에베소서 2장 8절, 9절). 성경은 실제적으로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고백하여 영접한, 그리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구주라 영접하면 영생을 얻으리라고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15장 1절-4절)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메마르지 않는 눈물에 애닮아 하시는 그런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이 우리 인간과 애통해하심이 그도 우리의 그 분을 필요로 함을 아심이다. “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장 15절, 16절)

이러한 죽음과 고통은 영원한 것일까?

시간은 하나님께 속했고 우리는 먼저 그것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이 영생이라는 그의 성전에 드리우사 그 자녀인 우리들을 당신의 만찬에 초대하신 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내가 지금 받고 있는 온갖 핍박과 매질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모든 고통들을 시험삼아 연단으로 여기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게 됢이 그 고난으로 다가옴이 비교되지 못함이더라” (로마서 8:18) 현재의 어려움이 극히 적다고 여겨짐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게 되는 영생의 기쁨이라.

하나님 아바 아버지께서 친히 예비하신 천국의 선물이 영생임을 알게 하사 죽음 과 고통의 삶이 생명의 삶이 되게 한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마다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 생명을 얻게 하시는 자 주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능 력이라 죄인이었던 우리를 의인 삼아 주시고 불 같은 심판에서 건지사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옮기사 죽음을 이길 수 있도록 우리에게 믿음을 허락하사 그것이 교회의 사명인 말씀 선포이며 세상을 향한 메시지인 성 경 말씀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4) 또한, 이러한 영생의 복은 천국을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기도하는 어린 아이의 마음과도 같으니 생명나무에서 넘쳐나는 흐르는 시냇물 따라 제철마다 자라는 나무처럼 에덴 동산의 저주는 하나님이 끊으셨다 – 이것이 보혈의 능력이라 (요한계시록 22:2-3)

그래서 성도들의 죽음이란 ‘소천’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죽음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중생이란 시간 동안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남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으로 더하사 의로운 옷을 입히사 주님과 함께 갈 수 있는 자격을 영원토록 새겨두셨다. 사실적으로, 성경에서 기록하기를 “예수님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피 흘리심을 경히 여기지 않으시는 분” (시편 116:15) 예수님을 믿으면 죄인들이 구원을 받고 그 창조주에 구속하심이라 (빌립보서 1:21-23) – 의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 또한 영생동안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상태가 있는데 성경은 주를 거역하는 자마다 “두번째 사망’을 맛보게 될것이라 하신다 (요한계시록 21:8)

우리들은 익히 영생의 복락을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옥 – 심판의 영원 한 불이 처벌로 가해지는 수치의 죽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 경고의 계시를 헛되이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어쩌면 천국의 메시지보다 더 강조하려고 하셨는지도 모른다. 죄사함을 받지 못한 자가 영생의 지옥불로 떨어질 것이라는 것과 복된 자의 삶이 영원하다는 것은 지극히 복음적이다. (그리스어 aionios) (마태복음 25:46). 하나님께서는 복음 안에서 풍성히 은혜를 나누기 원하시며 또한 죄사함을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미소를 짓지 않으신다. “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에스겔 33 :11)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고난에 대해 간과하지 않으시고 같이 기도해 주시는 성 령님의 도우심을 알려주시는 것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비로우시 다. 인간이 지금과 같은 고난과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은 우리의 잘못에 있다. 끔찍한 고통은 우리에게 그러한 재앙의 궁극적인 원인이 죄라는 것을 상기시켜야 한다 - 신에 대한 우리의 반항기독교인들은 고난의 시간 동안 위로와 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스럽고 위로의 팔을 뻗을 필요가 있다. 죽음을 미워하는 사랑하는 창조주의 품에서 힘을 찾을 수 있다. 언젠가는 불의 호수에 던져질 원수이다(요한계시록 20:14).

우리는 두 가지의 선택 사항이 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우리의 죄에 서 분리되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과 영원히 거하는 것; 아니면 우리의 죄로 인해 창조자이신 구주로부터 영생토록 떨어져 있게 되는 것이다. 심판의 날에 예수께서 악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다 “내게서 떠나가라” (마태복음 7:23, 누가복음 13:27) 나님이 우리가 성경에 선포된 죽음의 기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 할 때, 우리는 왜 이 세상이 그대로인지 비극과 죽음 가운데 어떻게 사랑하는 하나님이 있을 수 있는 지 이해할 수 있다.

과연 어떤 죽음이 낫겠는가? 하나님은 이러한 죽음마저도 달갑게 여기시는 수백 만년동안 그 수도 없는 질병이나 고난의 원인에 묵도하시는 동화 속에나 등장하 는 선하시기만 한 괴물은 아닐게다. 우리의 죄를 탓하시기 보다는 사랑과 격려 로서 말씀하시는 그 분은 바로 우리를 위해 눈물과 탄식으로서 기도를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되시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읍을 두고 울며, 그의 친구 나사로의 무덤에서 울었고, 우리 모두를 위해 우시는, 사랑스럽고 자비로운 구세주인 것이다

참고 문헌및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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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Such a justification of God’s goodness in the face of evil is known as a theodicy, from Greek θεός (theos) = God and δίκη (dikē) = justice, right. 텍스트로돌아 가기. 텍스트로돌아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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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Dawkins, R., River out of Eden, Weidenfeld & Nicholson, London, p. 133, 1995. 텍스트로돌아 가기. 텍스트로돌아 가기.
  15. Note that our argument is not that atheists cannot live ‘good’ lives, but that there is no objective basis for their goodness if we are just rearranged pond scum. 텍스트로돌아 가기. 텍스트로돌아 가기.
  16. Lactantius, On the Anger of God, chapters 4 and 13, Ante-Nicene Fathers 7, newadvent.org/fathers/0703.htm. 텍스트로돌아 가기. 텍스트로돌아 가기.
  17. Some claim that Isaiah 45:7 (KJV) teaches that God really creates evil. But here, the Hebrew ra is not contrasted with moral goodness, but with ‘peace’. So the NIV “I bring prosperity and create disaster”, and the NASB “Causing well-being and creating calamity”, are more accurate. But in the phras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ra is contrasted with “good”, so here refers to moral evil. 텍스트로돌아 가기. 텍스트로돌아 가기.
  18. Alec Motyer, Principal of Trinity College, Bristol, UK, argues this in his commentary, The Prophecy of Isaiah, IVP, Leicester, p. 124, 1993. 텍스트로돌아 가기. 텍스트로돌아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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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For the time frame, see Sarfati, J., 성경 역사가 왜 중요한가(Why Bible history matters), Creation 33(4):18–21, 2011; Refuting Compromise, p. 295, 2011; creation.com/bible-history-fall-ark-korean. 텍스트로돌아 가기. 텍스트로돌아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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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The theological implications of the Fall, what was affected, are discussed in Refuting Compromise, ch. 6 (see recommended reading). 텍스트로돌아 가기. 텍스트로돌아 가기.
  23. See also The Fall: a cosmic catastrophe: Hugh Ross’s blunders on plant death in the Bible, J. Creation 19(3):60–64, 2005; creation.com/plant_death. 텍스트로돌아 가기. 텍스트로돌아 가기.
  24. For a thorough treatment of the implications of the Fall taught by Romans 8, see Smith, H.B., Cosmic and universal death from Adam’s Fall: An exegesis of Romans 8:19–23a, J. Creation 21(1):75–85, 2007; creation.com/romans8. 텍스트로돌아 가기. 텍스트로돌아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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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The Greatest Hoax on Earth? pp. 56–59 (see recommended reading). 텍스트로돌아 가기. 텍스트로돌아 가기.
  27. Cited in Lee Strobel, The Case for Faith, Zondervan, Grand Rapids, Michigan, pp. 176–177, 2000. 텍스트로돌아 가기. 텍스트로돌아 가기.
  28. The Creation Answers Book, ch. 6, and The Greatest Hoax on Earth? ch. 16 (see recommended reading). See also the articles under creation.com/carnivory. 텍스트로돌아 가기. 텍스트로돌아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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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In the context of definitions like ‘murder is intentionally taking an innocent human life’, the meaning of the word ‘innocent’ is related to its Latin derivation in-nocens = not harming, i.e. not guilty of a capital crime. 텍스트로돌아 가기. 텍스트로돌아 가기.
  43. For evidence and significance of the Resurrection, see Cosner, L., The Resurrection of Jesus, creation.com/resurrection; the other articles under creation.com/res; and Christianity for Skeptics in the recommended reading. 텍스트로돌아 가기. 텍스트로돌아 가기.
  44. See Sarfati, J., The Incarnation: Why did God become Man? creation.com/incarnation, 23 December 2010. 텍스트로돌아 가기. 텍스트로돌아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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