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나님은 죽음과 고통을 허용하시는가?

저자:
번역자: 김정화

죽음과 고통의 문제

테러리스트들이 뉴욕 Twin Towers에 2001년 9월 11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3000명의

인명사상을 낸 사건이 있다. 많은 이들은 왜 선하신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그러한 일들이 자행되

는 것이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역사상에 행해졌던 대참사에 비할 것은 못되더라도

나치 연맹 하에 있던 진화론적 정권은 수많은 유대인과 다른 민족의 생명을 앗아갔다.

수년간, 자연재해들을 몰고 온 여러 원인들로 인해 있었던 참사들은 다만 자연현상으로 보기에

는 어려운 것은 예를 들면 9.3 강진 이후에 밀려드는 대형 쓰나미 (인도네시아 서쪽 근방 ) 가

2004년에 14개여국에 이르러 230,000명이 사망에 이르렀다. 더 큰 재앙들이 과거에 보다 확산되

어져 갔는데 예를 들면, 14세기에 검은 죽음 (bubonic plague) 이 유럽에서 75-200 백만명을 사상

자에 이르기도 했다. 스페인 독감이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이르러 50백만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

다.

천성적 장애요인들이 듣는 능력과 시야를 상실하게 만든 헬렌켈러의 이야기는 그의 불우하였

던 성장 시기를 반영하기도 한다.

우리는 전부 다 개개인으로서의 질병, 사고 그리고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난관들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랑의 근원 가치이신 하나님을 생각 해 볼 때 왜 그러한

고난과 고통 그리고 사망의 섭리를 거두지 않으시는가 반문하게 된다.

이러한 고통의 문제들은 무신론자들이 근본적으로 묻게 되는 성경에 대한 반론이면서도 더 정확

히는 창조주에 대한 회의론적 반격이다. 그들에겐 답이 필요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데는 고통의 문제가 있다.

다수의 이들이 –심지어 많은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죽음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는 알고자 하려 하

지 않는 이유가 근원적인 답을 알 수가 없다고 회피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연대인 수백억 만년이

나 몇백억 만년의 세계관으로는 고통이나 고난을 통해서도 목적을 이루는 삶을 발견 할 수 있다

는 창조주의 섭리를 알아가는 데는 자가당착적인 요인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Charles Darwin (1809-1882) 은 그의 딸의 사망 소식을 접한 후 기독교를 거부하기로 결단했다.

“ Annie의 처참한 죽음은 그 아버지의 세계관 뿐만이 아니라 윤리적 모태까지도 갈기갈기 찢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가 기독교에서 자신을 파기하기까지는 이 힘든 고통의 문제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리하여 그 자서전에 나와 있는 대로 무신론자가 되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종의 기원이라는 저서에서 고통과 죽음이라는 관제에 대해서 반기독교적인 무신론을 기반으로 한

역사의 기원을 다루고 있다. Darwin은 현대사에서 보여진 전쟁이나 기근과 사망의 참상을 생각할

때 죽음이 그의 진화론적 세계관으로 볼 때 마지막이라고 단정한다.

Richard Dawkins (1941- ), 저명한 무신론자이기도 한 그는 동물학대를 하나님이시자 창조주이

신 그 분께 반기를 드는 변론의 이유들로 대기도 한다. ‘Darwin’s Bulldog’에서 불가지론자

T.H.Huxley가 지적했듯이: “우리가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인류적 고통에 반응할 수 있는 끊임

없는 관심과 격려가 있다면 우리에게 있는 두 귀는 벌써 소멸되고 없을 것이다.”

Charles Templeton (1915-2001), 유명한 부흥사이기도 한 그는 그의 역서 Farewell to God 에서 쓰

기를 어떻게 그가 기독교를 저버리고 자유신학을 표방하게 된 데에는 엄청난 고통의 문제가 다가

왔을 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다는 믿음과 그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부정하기 시작

했을 때였다. 그 견디기 어려웠던 고통 안에서 모든 삶의 지표가 죽음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육식동물은 다른 먹이감을 찾아 돌아다니며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이 약육강식의 생

존 원리는 무시무시한 맹수가 날카로운 이로 습격을 해서 잡아먹고 사는 피를 말리는 정글의 법

칙은 그다지 창조주가 과연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회의를 들게 한다.

죽음에 대한 일반적 견해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까지도 죽음에 대한 멘트는 삼가는 것이 예의가 맞다.

“ 그 분은 인생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정도로 정석의 삶을 사신 것 같아.”

그러나 역시 죽음은 여전히 우리를 비껴갈 수 없다는 사실에 수긍할 따름이다. 건강하게 죽음을

맞이 할 수 있다면야 누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갑작스런 자녀의 죽음이 공평하지 않

을 수 밖에 없는 부모가 5살 때가 아니고 21세나 75세에 나의 자녀를 데려가시면 않되었을까

많은 사상자나 인명피해를 내는 재난과 같은 자연 재해의 양면에는 그것을 초래하게 한 우리들의

책임도 피할 수 없다는 얘기다. 수백만이나 되는 죽어간 이들의 모습을 인류의 밝은 미래로 보기

에는 극히 어렵다. 그리고 칠백만명의 수가 되는 사람들이 기적이 나타나길 바라며 죽음과 싸우

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과연 우리가 생명의 연장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신 그 무엇으로 대신

할 수 있겠는가?

무신론자들의 견해: 그들만의 가치인가?

무신론자에게는 기독교 가치관의 하나님이 인격자 되심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그 안에는 선이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그(것)에 상응하는 죄와 벌을 만들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진화된 쓸모 없는 존재라면, 그 진화론적 무신론자의 말대로 옳고 그름은

어디에도 없다. Dawkins은 말하기를, “ 우주 만물의 생성 원리는 허무하기만 할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렇게 선과 악의 기준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고 멸시 받는 멸망의 시대에 단순히 원

숭이 같은 조상만도 못하게 인간들을 행동하게 조장하고 있는 이러한 세상에서 과연 생존이라는

일개의 일념이 아니라면 무엇을 그들에게 바랄 수 있겠는가?

또한 한 마리의 개구리가 수천 마리의 파리 떼를 죽이는 것 보다 테러리스트들의 뉴욕에서 빌딩

격파로 희생된 사상자들의 죽음이 어찌 비교가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배

울 수 있는 교훈은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변론을 끊이지 않고 그 악의 범주를 이미 넘어선

결과로서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반론으로 살아갈 뿐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법을 준행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 이유는 성경에 도덕적 기준과 관습적 행함의 모범들이 캐논으로서 적혀있기 때문이

다.

무신론 적 주장이 요약되어있다.

무신론을 맹목적(표방)으로 따르거나 선전하는 이들에게는 논리적인,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어떠한

것도 그들에게는 가치없는 변론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교도인 그리스의 철학자 Epicurus

(341-270 BC), 이 후에 기독교 변증학자 Lactantius (AD 240-320),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계몽” 회

의론자 David Hume (1711-1776)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 본론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 분은 전지 전능하시며 아무런 흠이 없으시로다.
  2.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모든 악을 없애버리지 않습니까?
  3. 하나님은 이미 악을 알고 계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4. 하나님이 정결하시다면 악은 왜 현재합니까?
  5. 악은 존재한다.
  6. 만약에 악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존재도 알 수가 있고 하나님은 모든 악을 수반하지 않는가? 악을 하나님이 없애 버릴 수도 악의 존재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7.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첫번째 장은 Judeo-Christian God를 묘사가 되어지면서 성경을 보게 된다. 2-4장에서는

그러한 설명 안에서 #5는 중요하다. 그리하여 불가지론 자들이 하나님이 성경에서 나타

나는 대로 계시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6) 그리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다 (#7)

#1을 다시 재고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유신론’과

‘과정신학론’을 결합함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전개되는 반론

기독교적 철학사에 있어서 어떤 이들은 #4가 더 변론되어야 함을 주장 해 왔다.

4’ 하나님이 꼭 필요해서 허용하지 않는 한 악은 소용이 없다. 그러면 #5라는 동떨어진

구별된 것이 된다.

어떠한 불가지론 자도 악을 허용하는 어떠한 선한 이유도 없다는 결론을 냄으로서 유신

론이 거짓임이 밝혀지게 된다. 하나님의 악을 허용하심은 인류의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Apologist=옹호자가 여기서 그들의 변론들이 헛된 것임을 잘 알려주고 있다. 악

의 존재는 이미 #4과는 맞지 않는다;

4”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그는 악을 가까이 할 수 없기에 악과 존립할 수 없다.

그러나 사실인가? 하고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왜냐면 우리 안에는 악이 존재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살려두신 것은 그 분의 구원계획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회개해

야 한다.

5’ 지금부터 영원히 악은 멸하여 질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성경에 기록됨)

그러나 다만 아직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만민에게 이르지 않았을 뿐이다.

1, 4/4’,5’는 하나님에 관한 설명들이다.

이것은 놀랍거나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아니지

만 여전히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실재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

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악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찾아본다.

악은 왜 하나님이 허용하시는가?

하나님이 완전하사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심히 좋았다” 라고 하셨다. (창세기 1:31).

사실상 악의 존재는 증명할 수는 없다. 또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자 어거

스틴이 지적했듯이 악은 선한 모든 것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살인죄와 같은 다른 사람

의 목숨을 앗아가는 악을 행하는 범죄이다. 간음죄는 가정을 파괴한다. 선은 모든 것의

기본이며 자체로 악과 맞서지 않아도 된다. 악은 선한 모든 것에 있는 하나님이 부여하

신 가치들을 앗아가고 파괴시킨다.

악은 인체와 같은 여러 기관들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상처는 몸과 분리되어서 생겨날 수 없으며 건강한 인체는 상처를 치료하는

데 표본이다. 장님이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분명히 악이며

인간이 볼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고 ( 그러나 굴은 악이다. 그래서 장님은 oysters에 대해서

악이 아니다.) 그래서, 악은 보이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이러한 악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물체 – 이른바 동물과 식물을

이름하게 하사 아담에게 다스리게 하신 그 준엄한 명령 안에 있다. 특별히 사람들과 동

물들은 초식을 해 왔는데 (창세기 1:29-30) 그 곳은 폭력도 고통도 없었다. 이사야 11장

6절-9절 그리고 65장 25절도 미래를 이러한 아름다운 에덴 동산처럼 바라 볼 수 있게

한다. 이 본문들은 사자와 소, 늑대 그리고 양 그리고 해롭지 않은 viper에 관한 인용들

이다. 두 본문들이 보여주는 이상적인 세계에 대해 알 수 있다. : “누구든지 다치게 하거나 파괴하지 마라.”

“아무도 해악하지 말라”

이러한 경고는 다만 “심히 좋았다”라고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게

되어있는 우리는 그 분의 피조물로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 VS 사단의 죄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사 천사들과 함께 반역의 죄를 저지르게 하셨는데 그것

은 자유의지로 하나님께 반대하는 결정을 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죄와 분리되어야

하시는 성결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화해자

삼으신 십자가의 능력이다. (하박국 1:13, 요한일서 1:5)

이러한 죄들은 악은 아니지만 그러나 악의 문제는 그 누구에게도 자유롭지 못하다. 하나님은 여호와를 신령으로 예배

하는 자에게 상급을 주시는 자요 이것이 명백히 드러나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특권이요

참된 자유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창조하셨으되 로보트처럼 “나는 당신을 사

랑합니다.” 라고 기도하시기를 원하시지 않으셨다.

아담의 원죄는 하나님이 주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을 듣지 않아 주님이 주신 권한 (에덴 동산을

다스리라 )을 포기 한 채 하나님과 분리되었다. (Genesis 1:28, 3)

아담의 죄와 그 결과들

창조주 (6일 창조) 간 후에 이브가 뱀의 유혹에 금지된 과일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

도 주어서 뱀에게 속지도 않았지만 결국은 먹게 되었다. (1 디모데전서 2:13-14)

그 죄는 인류의 원죄가 되었고,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죄의 결과들을 낳게 되었다. (로마서

5:12 ff), 그리고 하나님께 더 많은 누림을 받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

함에도 더 이상 죄의 염려보다 긍휼하신 하나님을 바라게 하신 용서의 하나님이다. (시

편 51:5, 예레미야 17:9, 로마서 7:15-25) 오늘날 사람들이 죄를 계속해서 하나님께 행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죄성이기 때문에 구원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암 담당 전문의가 암 치료를 할 때처럼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악의 근원까지도 알고 계시는 분

이다. 하나님의 지혜로서 인간들의 파멸할 악까지 염려하고 계신다. 영생에 이르러

구원 받은 인류는 죄에 대한 구속력을 잃는다. 구원은 에덴의 동산 보다도 더 새

로워진 지상낙원에서 사는 것처럼 행복한 상태에 이른다고 한다면 그것은 동일하신 주

의 창조하신 구속사역이며 은총과 자비이다.

자유의지와 악의 문제: 기독교 변증론

자유의지는 종종 기독교 변증론에서 악의 문제에 결부되곤 한다. 성경적 의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남으로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다.

그래서 후손들은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 죄에서 고통받게 되었다. 오직 영생으로의 길

이 구원이요 죄의 삯인 사망으로부터 끊어짐이다.

그러나 고의로 9-11 사태와 같은 테러를 행한 것은 바로 사람들, 인간이다. 이러한 어려움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변론들과 함께 행해지는 악의 결과이지만 그저 목도만 할 수 없는 비극의 참상이다.

악의 문제

도덕적 체계는 그 법적 조치에 관하여 Darwin, Templeton, Dawkins의 양육강식이론에서 근본적인 해법이 없으며

더 타당한 답으로는 성경적 역사관이 필요하다.

죽음과 고통은 죄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한 가지의 불문계명을 주셨는데 그가 어길 시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2:17 ) 하나님은 그 자신의 말씀을 지키고자

아담을 심판하사 죽음에 이르게 하신다. (창세기 3:19) 이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주

신 생명의 원리가 아니라 사망의 둘레를 자신의 손으로 세우신 아담에게 내리신 처형

이었다 (창세기 3:19) 그리고 첫번째 소산이던 아담에게 주시고 싶었던 선물이 아니었

음이 분명하다. 신약은 사망을 “마지막 원수” (1 고린도 전서 15:26) 그리고 ‘죄의 대가’

(로마서 6:23)라고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망에 이르는 것은 죄이며 그것은 하나님과 분리 된다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하나 뿐인 아담을 죽인 결과도 하나님이 맡게 되었다. –그는 동물을

죽여 아담과 이브에게 옷을 해 입혔다. (창세기 3:21)

그 결과로 하나님이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심판의 결과 아래 인간을 두셨다 – 사망과

악의 권세

그래서 아담은 우리 인간의 가장 첫 아담으로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닮

아가는 데 있어 인간적 계보이기도 하다. 바울이 서신서 에서 재차 반복하듯이 5:12-19

바울이 성경에서 언급하듯이 (로마서 5:12-19) 우리는 '아담'으로써 죄를 짓고 아담과 같은 죄성의 문제가 있다.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모든 인류가 아담의 모형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 살기를 원한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의 주시요 그 안에 생명이 있느니라 반역의 죄는 크다. 성경은 다

시 한 번 말하는데 아담의 죄 뿐만이 아닌 우리의 죄가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5:12) 다른 이들의 죄를 볼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죄를 주께 고백하라

왜냐하면 죽음과 고통 속의 문제들이 모두가 죄와 관련이 있기도 하다. 우리에게도 잘

못되어져 가는 세상만 탓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아무도 죄가 없지 않다.

인류의 세상을 다스림은 (창세기 1:26-28) 아담이 죄를 지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인류의 타락을 말한다. 로마서 8장 22 절에서 말하듯 “ 온 만물이 슬피 울고 잉태하는

소리에 신음하며 아파하니” 그래서 하나님이 여자에게 자손을 잉태하게 하시는 고통을

더하사 (v.20) 그 아픔을 들으시더라.

하나님께서 사망의 권세 안에 사랑하시는 자신의

권속을 두심은 (골로새서 1:16-17) 광야 40년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보이신 구속 사역을 볼 때 (히브리서 1:10-11)

알 수 있고 다니엘 3장에서는 불타는 성령 안에서 춤추고 있는 세 명의 친구들을 보면

천지 창조의 계시를 빛 되신 그리스도를 예시한다. 죽음, 고난, 질병 등은 하나님의 완

전하신 통치에 위배된 것일 지도 모른다. 하나님과 고립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가장 큰 형벌이다. (cf. 로마서 1:18-32)

올바른 답

이러한 질의 방식을 도입한 사람은 유명한 기독 변증가 Norman Geisler (1932- )

이다. Templeton의 ‘자연주의의 폐악’ 그리고 자연의 무질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은 동물들을 실낙원에서 마냥 먹혀두게 하지 않으셨으며 서로 공존했지 서로를

먹이로 삼지는 않으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미래에 하나님께서 “새 땅과 새 하늘을 여셨

으니” “ 늑대와 양이 서로 풀을 뜯어 먹으며 사자가 소와 같이 될 것이다 “ 다른 말로

말하면, 이러한 실상의 모습들은 없어질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

셨을 때 그 모든 것이 좋았더라. 인간의 타락이 이러한 결과들을 불러왔다. 그래서 하

나님께서 다 멸하라고 하신 것이다. (로마서 8장)

인간의 수명이 달라졌고 ( 노아의 방주 창세기 11장 ) 하나님의 계획은

선하신 것이었다. 인간의 죄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이것 또한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

안에 회복과 구속의 역사가 있게 되는 것이다.

좋은 예

식동물이었는지 그리고 이로운 박테리아가 해로운 박테리아로 되는 지의 과정을 보라.

왜 수백억년의 장구한 연대가 틀린가

Geisler가 믿고 있는 진화론적 늙은 우주의 역사관은 성경적인 젊은 지구의 연대만이

맞게 될 것이다. 수백억년의 연대는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암석층을 이루는데 걸

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과학은 정도가 맞지 않고 조롱거리가 되었다 여

기서 주목할 점은 Geisler가 발견한 대로 화석들이 들어 있다는 점입이다. 죽은 화석체

까지도 말이다. 이러한 죽음을 아담의 죄 이전으로 그 시기를 정해 놓음으로 성경의

죄가 사망을 낳는다는 진리에 위배된다.

인간의 죽음

이러한 화석의 증거들은 아담의 죄가 사망의 권세 아래 안에 인간을 두게 하신 하나님

의 고난인 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

    로마서 5:12-16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를 말미암아 사망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까지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

    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 즉 더 하나님 은혜

    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고린도 전서 15:21-22. 45-47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

    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이러한 "첫번째 사람, 아담"의 불순종이 인간의 죽음을 야기시켰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죽음이 예수님의 순종과 부활로서 연결되어 "두번째 사람" 그리고 "마지막 아담"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Geisler는 아담 이전에 인간 화석들이 연대 측정 방법에서 시간의 공간이 존재함을 부

인하지 않는다. 195,000년 전에서부터 방사성 동위 원소는 그 연대 측정에 있어서 두

개의 호모사피엔스 골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류의 조상은 아담

이며 성경적 연대기의 어떠한 면을 보아도 타당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기원과학의 시

류 더 심한 것은, 식인의 증거가 화석에 남아 있으며35 아담이 지어지기 한참의 시간이

지난후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인간 화석들조차 성경적인 사실들을 포괄할 수 없다.

Geisler가 보여준 답은 제시된 수백억년의 연대와 일치하지 않음을 알게 한다. 성경의

진리에 반거하는 이러한 거짓 이론-수백억년의 연대으로 현혹되지 않는 지혜로운 신앙

인이 되어야 겠다.

동물의 죽음

Geisler는 육식활동이 아담의 타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은 맞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에서조차도 그 비극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예를 들면, 화석 기록에

의하면 칠면조 크기의 Compsognathus가 도마뱀의 배36에 있는 것과 유명한 Velociraptor

가 계속적으로 Protococeratops와 같은 종양과 싸우다가 화석에 나타난 것을 찾을 수

있고, “T.rex(화석분)은 뼈 성분의 높은 30-50% (고밀도)를 보여주고 있다.37” 우리는 또한

화석 기록에서 종양들을 찾을 수 있다.

Geisler의 변론이 맞는다는 주장이 6000년대의

성경적 연대기에 근거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 과전은 또한 아담의 타락 후에 있게 된

화석들에 대한 논리정연한 설명은 창세기 6장에서 9장의 노아의 날에 대홍수에 나와

있다. 그리고 난 후 바벨탑 사건이 있었고 인간 화석들이 있게 된다. (창세기 11장)

미래에 대한 성경적 해석: 회복

수 십억만년 동안 줄기차게 우리 인류를 괴롭혀 오던 죽음과 고통의 문제들이 어떻게

미래를 통해 보이신 구속의 은혜를 널리 전파함으로서 이기적인 과학이나 통념이 아닌

국가적 이해관계도 머무를 수 없는 그 회복의 자리가 복음을 듣는 이마다 알게 될 것

이다. 사도행전 3장 21절에 의하면 폭력도 죽음도 없는 상태가 되는 이상적 사회가 열

릴 것이며 오래된 연대의 문제 또한 새 땅에 대한 창조주의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아닌 완전한 새 것으로의 도래를 뜻한다. 늙은 우주의 딜레마를 또 한 편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이것으로는 해답을 구할 수 없으며 그 문제의 답은 완전한 구속사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고난에 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다뤄주시는가? 성경은 고난을 통

해서 연단을 연단은 인내를 낳으리라 하신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고난은 성경 속의 인

물 욥을 통하여 알게 하시는데 욥은 하나님께 알 수 없는 고통과 죄의식 속에서 하나

님의 뜻을 구할 수 없었으나 욥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래서 욥은 어떠한 문제 제기나

하나님께 불평하는 대신 하나님을 믿고 따랐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태생으로 눈이

먼 자를 지날 때 그 죄가 그의 부모나 그의 죄 때문인지를 물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무의 죄가 아니리라. 예수님께서 그 맹인을 고치시며 말씀하시기를 그의 맹인이 된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남이라. (요한복음 9:1-7)

비록 죄 씻음과 같이 병 나음이 되지 않더라도 그것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죄나 믿음

이 부족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 또한 그 병이 나음을 받고자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다고 전한다.

“내 은혜가 족함이라 약한 데 강한 내 능력이라” –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많은 그리스

도인들이 삶의 지침과 아픔 그리고 증오들이 깨끗이 나음을 증거하고 있다. 또한 풍요

로우신 그 은혜를 넉넉히 부어주사 새 생명 얻게 하시는 보혈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누가복음 13장 4절은 예수님의 이러한 현대적 참상에 대해서 또한 경고하신다. 예)

9/11 테러에서 사람들이 빌딩에 파묻혀 죽어가야 했는 지를 예수님께서 성경에서는 이

렇게 비유하신다. “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

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개인적인 죄가 아니더라도 우리

는 여러 고난 중에 있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정

녕 회개하지 않으면 당신은 결코 영생을 얻고 복을 누리지 못하리라” 아무도 죄가 없

지 않으며 완전한 이는 없다. 우리는 전부 다 죄인이었다가 죄의 결과인 사망으로 저주

받았던 이들이니

어느 부자와 나사로는 고통의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준다. 성경은 결코

고통과 고난의 문제에 대해 침묵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에도 불구하고 이러

한 우리들의 죄들을 심판하사 그 분의 사랑하심을 선포하셨다. 누가복음 16장 19절에

서 31절까지 나오듯이 이 땅에 오시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이 세상에

허다한 고난과 고통을 이해하는 길이다.

믿음은 있으나 거지 행색이었던 나사로에게 욕심많고 사악한 부자가 아프고 테이블 밑

에서 주어 먹고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이 공평하지는 않다고 여길 지 모른다. 그러나 성

경에 쓰여 있듯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부활은 영생이

요 마지막 날에는 심판이 이르나니

성경적 관점: 고통의 문제

사도 바울은 “ 약한 데 강함이라” 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어려움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임을 말한다. 그는 매를 많이 맞았으며 감옥에 갇혔으며 돌에도 맞았으며 배가 도

중에 파선되기도 했으며 강도를 당했으며 많이 지쳐서 힘들었으며 굶주렸으며 물이 없

어 목이 마를 때도 있었으며 혹한에 시달렸으며 마침내 그 또한 순교 당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고난을 담은 편지들을 통해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부활은 고린

도전서 15장 14절과 19절에서와 같이

“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그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실체는 극히 불쌍할 뿐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성도들의 환난과 핍박들에 대해 필자는 5가지의 상을 주시는 것을

다음과 같이 필자하고 싶다.

우선, 그 뜻을 살펴본다면

  1. 고난은 우리들을 강건케 하사 완전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참예함으로 욥은 성경을 통하여 그가 받은 고난과 시험을 통해 나를 정금과 같이 단련하사 (욥기 23:10) . 하나님은 예수님의 인생 또한 우리들이 배울 수 있게 완벽한 인격체의 선생님으로서 알게 하사 성경을 통하여 그 분의 삶을 조명하게 해준다.“단순히 인간이셨다면 불가능 한 완벽한 사역을 이루신 것은 그 철저한 순종하심이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달게 받으심이요 성경과 구원, 영생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있음이다” (히브리서 5:8-9)
  2. 그리스도에게로 가까이 다가감은 고난 또한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예수님은 애통해 하는 자요. 복음을 위하여 씨앗을 뿌리는 자들의 눈물을 아시는 분이다. 그 사랑의 표현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요. 우리는 어려움을 겪게 될 때마다 십자가를 기억하며 기도하게 된다. 그 고난을 넘어선 희생과 자비는 감히 측량할 수 없다.
  3. 고난을 겪은 후에 성도들은 예수님께 나아가 섬기는 법을 배우게 된다. 히브리서 1:8에 의하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을 통해 고난을 극복하게 하여 신앙생활에 힘쓰게 한다. 고린도 후서 1장 3절에서 4절까지는 “위로의 하나님”에 대해서 간략히 소개되고 있으며 그 자비로우심에 대해 말한다.
  4. 고난은 천국의 영광에 이를 때까지 주의 또한 함께 하심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많은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음을
    “ 우리가 잠시 받을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린도 후서 4장 17절)

    고난은 언제 다가올 지 모르는 그 크신 영광 속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의 죽음과 고난에 대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

사람들은 하나님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저 관심을 끄는 어떤 대상으로나 여기진

않는 지 서로들 의아해 할 때가 많다. 하나님은 그들에게는 무능력 한 존재일

뿐 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벌써 많은 축복들

을 당신을 통해서 알게 하신다.

예수님의 험난한 십자가 사건44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과 용서의

의지를 굽히지 않으셨다. 아담의 죄는 인류에게는 크나큰 죄악이었다. 우리들의

육체가 죽어서 갈 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음으로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속하게 된다. (마태복음 10:28, 빌레몬서 1:21-23, 요한계시록

6:9-11) 우리의 지체는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말씀하시

고 용서하지 않으셨다면 아담의 죄가 우리 인류의 것으로 영원토록 그 사망의

삯을 하나님과의 분리라는 끔찍한 고통이요 비극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화해해서 영생의 축복과 구원의 감격을 받는 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

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능력을 믿는 것이며 이것이 예비된 그리스

도인의 삶의 시작이다. 레위기 17:11은 이렇게 보혈의 능력 됨이 구약에서 나타

나고 있는 지 속죄의 제단을 통해서 십자가의 사건까지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

스도(대제사장)이 아담과 그 자손들 때문에 최후의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신약에서 우리를 속량케 하셨다.

“육체의 생명은 피이라 “ 피는 생명을 일컽는다. 신약에서는 “피흘림이 없이는

죄의 용서도 없으니 “ (히브리서 9장 22절)

왜냐하면 우리는 피와 살로 만들어졌으며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피흘

왜냐하면 우리는 피와 살로 만들어졌으며 우리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

에덴 동산에서는 하나님이 동물을 죽여 아담과 이브의 옷을 입혀 그들의 죄를 덮어 주는 장면이 있고 피의 제사가 죄를 없애기 위해 필요했다.

이스라엘에서는 동물의 제사를 드려 이 정결법을 거듭하게 한다.

히브리서 7장 27절,9장 9절, 25절에서는 이러한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왜냐면 구원과 속량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성령님 (세번째 중 삼위일체)

에 의해 잉태하셨으며(, 갈라디아서 4:4 이사야 7:14 마태복음 1:23, 누가복음 1:34, 누가복음 1:35 )

지금까지도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나 환난

을 당하거나 복음을 전할 때마다 성령님께서 탄식의 기도로 우리를 통한 하나님

의 사역을 알게 하사 능력을 부어주신다. 또한 모든 유혹과 시험을 물리치신 예

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십자가를 통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섬기게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인간의 형

상으로 오셔서 그 완전함을 이루셨다. –죄를 구속하여 의를 이루심.

우리의 창조자 되시고 구주로서 성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 이렇게 인류의 역사

를 (요한복음1:1-14)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아담의 후손에서부터 마지막 아담

에 이르기 까지 죄없다 여김을 받게 하시다. ( 고린도 전서 15:45) 그리고 여러

죄와 유혹에 맞서고 있는 우리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흠이 없이 비둘기 같이 순

결하여 영원한 언약의 제물로 바쳐지기까지 그의 어머니셨던 마리아의 기도와

간구로 그 완전한 사역을 마치시게 되셨다.(히브리서 4:15) 인류의 최초 조상인 아담은 죄악과

사망의 권세가 관영한 지금 세대를 본 받지 말라는 기독교의 핵심-예수 그리스

도 “마지막 아담” 구속자 되신 분을 닮아가기를 촉구하고 있다,

어떠한 이도 다

른 이들을 위해 대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은 없다. (히브리서 7:27)

그러나 여기서 주목 할 점은 예수는 완전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두번째 사람

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형상으로 이 땅에 오시사 우리들의 죄들을 담당

하시고 울부짖으시매 “주여, 어서 들으소서!” 하시는 세번째 사람되신 성령님의

오심을 들으신 듯 하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들의 울부짖는 기도들과 애통해함

을 절대 져버리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비록 그가 알 수 없을 지라도 우리들의 회개함과 애통해 함 마저 들으

시사 죽음과 고난을 겪게 되는 우리 못난 인간들의 편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화해의 영이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듯이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으리라는 성구는 하나님

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생애 앞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그 이름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라. 그리고 사망 권세를 능히 이김이니라. 영생은 오직 믿음으로만

말미암이니 (요한복음 1장 12절, 에베소서 2장 8절, 9절).

성경은 실제적으로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고백하여 영접한, 그리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구주라 영접하면 영생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장 1절-4절)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메마르지 않는 눈물에 애닮아

하시는 그런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이 우리 인간과 애통해하심이

그도 우리의 그 분을 필요로 함을 아심이다.

“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

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장 15절, 16절)

이러한 죽음과 고통은 영원한 것일까?

시간은 하나님께 속했고 우리는 먼저 그것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이

영생이라는 그의 성전에 드리우사 그 자녀인 우리들을 당신의 만찬에 초대하신

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내가 지금 받고 있는 온갖 핍박과 매질과 주 예수 그리

스도로 말미암은 모든 고통들을 시험삼아 연단으로 여기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게 됢이 그 고난으로 다가옴이 비교되지 못함이더라” (로마서 8:18)

현재의 어려움이 극히 적다고 여겨짐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게

되는 영생의 기쁨이라.

하나님 아바 아버지께서 친히 예비하신 천국의 선물이 영생임을 알게 하사 죽음

과 고통의 삶이 생명의 삶이 되게 한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마다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 생명을 얻게 하시는 자 주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능

력이라 죄인이었던 우리를 의인 삼아 주시고 불 같은 심판에서 건지사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옮기사 죽음을 이길 수 있도록 우리에게

믿음을 허락하사 그것이 교회의 사명인 말씀 선포이며 세상을 향한 메시지인 성

경 말씀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4)

또한, 이러한 영생의 복은 천국을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기도하는 어린 아이의 마음과도 같으니 생명나무에서 넘쳐나는 흐르는 시냇물 따라 제철마다 자라는 나무처럼 에덴 동산의 저주는 하나님이 끊으셨다 – 이것이 보혈의 능력이라 (요한계시록 22:2-3)

그래서 성도들의 죽음이란 ‘소천’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죽음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중생이란 시간 동안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남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으로 더하사 의로운 옷을 입히사 주님과 함께 갈 수 있는 자격을 영원토록 새겨두셨다.

사실적으로, 성경에서 기록하기를

“예수님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피 흘리심을 경히 여기지 않으시는 분”

(시편 116:15)

예수님을 믿으면 죄인들이 구원을 받고 그 창조주에 구속하심이라 (빌립보서 1:21-23) – 의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

또한 영생동안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상태가 있는데 성경은 주를 거역하는 자마다 “두번째 사망’을 맛보게 될것이라 하신다 (요한계시록 21:8)

우리들은 익히 영생의 복락을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옥 – 심판의 영원

한 불이 처벌로 가해지는 수치의 죽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 경고의 계시를 헛되이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어쩌면 천국의 메시지보다 더 강조하려고 하셨는지도 모른다.

죄사함을 받지 못한 자가 영생의 지옥불로 떨어질 것이라는 것은 지극히 복음적이다. (그리스어 aionios) (마태복음 25:46).

하나님께서는 복음 안에서 풍성히 은혜를 나누기 원하시며 또한 죄사함을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미소를 짓지 않으신다.

“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에스겔 33 :11)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고난에 대해 간과하지 않으시고 같이 기도해 주시는 성

령님의 도우심을 알려주시는 것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비로우시

다. 고난 속에 있다면 울부짖으라! 그 분이 분명히 들으실 것이다. 동시에 우리

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하나님의 죄와의 분리되심이다. 그래서 더욱더 믿

음으로 진리되신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앙으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삶이 고달플지라도 우리에게 언제나 동일하신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안에 안식이 있고 풍요가 있다.

창조자되신 하나님은 절대로 죽음을 희생적이라고 여기시지 않으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다. 고난과 죽음이 지배하

게 되는 삶은 그러하신 성품에 맞지 않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 반역해서 맞서

는 결과가 초래되서는 않된다. 고난의 때 가운데에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하나

님의 동일하신 사랑과 돌보심의 격려가 그리스도인들의 선행 속에서 드러나길

전도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옥불의 끝으로 언젠가는 던져지고 싶은가? 하나

님은 절대로 그러한 사람들이 있기를 원하시지 않는다.(요한계시록 20:14)

우리는 두 가지의 선택 사항이 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우리의 죄에

서 분리되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과 영원히 거하는 것; 아니면 우리의 죄로 인해

창조자이신 구주로부터 영생토록 떨어져 있게 되는 것이다.

“내게서 떠나가라” (마태복음 7:23 , 누가복음 13:27 ) 예수가 심판 때에 명할찌어

다. 사망이 죄를 낳고 성경에서 기록된 복음의 능력됨으로 우리는 이 죄악이 관

영한 세상 속에서도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그의 오른팔을 드사 사망 권세

능히 이기시도록 우리 성도들을을 사용하시어 교회로 인도하시는가….

과연 어떤 죽음이 낫겠는가? 하나님은 이러한 죽음마저도 달갑게 여기시는 수백

만년동안 그 수도 없는 질병이나 고난의 원인에 묵도하시는 동화 속에나 등장하

는 선하시기만 한 괴물은 아닐게다. 우리의 죄를 탓하시기 보다는 사랑과 격려

로서 말씀하시는 그 분은 바로 우리를 위해 눈물과 탄식으로서 기도를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되시기 때문이다.

Helpful Resou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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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s Steve Kumar, Jonathan D Sarf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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