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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글호의 훌륭했던 선장, 로버트 피츠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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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예보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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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한국창조과학회 (creation.kr)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FitzRoy, 1805~1865)는 비글호(HMS Beagle)의 선장으로 찰스 다윈(Charles Darwin)과 함께 전 세계를 항해했다. 피츠로이는 종종 분노와 우울증에 취약했던, 완강하고 논쟁적인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결국 그는 자살을 했다(부록을 보라). 그러나 다윈은 그의 자서전에서 피츠로이는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고, 과실에 관대하고, 대담하고, 단호하며, 불굴의 정신으로 원기왕성하며, 그의 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고상한 성품을 가졌던 것으로 쓰고 있었다.1

그의 인정받고 있는 업적

2004년에 나온 그에 대한 자서전2에서 강조되고 있듯이, 그는 헌신적인 남편이자, 아버지였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피츠로이를 일류 측량사이자, 기상학의 선구자로서 그의 업적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또한 원주민의 권리를 지지했다.

피츠로이는 비록 칭호는 없었지만, 귀족 가문 출신으로 찰스 2세 왕의 증손자였다. “그는 (비공식일지라도) 왕족 출신임을 나타내기 위해, 그의 성에 대문자 R을 고집했다.”3

피츠로이는 13세에 왕립 해군에 합류하여, 포츠머스 왕립 해군대학(Royal Naval College)에 들어갔고 광범위한 교육을 받았다.4 고전(라틴어와 그리스어 포함) 외에도 커리큘럼에는 지리학, 역사, 기하학, 프랑스어, 펜싱, 드로잉, 댄싱뿐만 아니라, 항해술, 유체 정역학, 역학, 천문학 및 “천체의 운동”(여기에는 미적분과 같은 Isaac Newton의 저작을 포함한다) 등이 들어있었다.5 1828년, 불과 23세의 나이에 피츠로이는 비글호(HMS Beagle)의 선장으로 첫 번째 임무를 부여받았다.6 그는 자신이 매우 유능한 선원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그 당시 선박의 선장은 ‘일선에서 직접 뛰어야’ 했다. 쌍둥이 돛대와 정사각형 돛을 가진 길이 28m, 무게 214톤의 비글호를 운항하려면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다. 원래는 쌍돛대범선(brig)이었던 것을 바크형 범선(돛대가 세 개 이상인 범선)으로 재장비되었다. 이런 유형의 배는 파도와 강한 바람에 의해 흔들릴 때 ‘뒤집히는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당시에는 ‘관함’으로 알려져 있었다.7 이와는 대조적으로 1770년 호주 보타니 만에 도착했던 쿡 선장의 유명한 엔데버호(Endeavour)는 세돛대의 배로써, 길이가 32m, 무게가 335톤으로 훨씬 더 견고하고 안전했다.8

비글호에 탑승한 사람들의 임무는 남미대륙의 남부 해안에 대한 측량을 완료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그 배의 첫 번째 항해 때 다른 선장의 인도 하에 시작했던 일이었다. 또한, 천문학적 관측을 하는 것과, 피츠로이가 값을 지불하고 그의 작은 선실에 보관했던 22개의 매우 정확한 크로노미터(천문 항해용 정밀시계)를 사용하여, 경도를 완전히 한 바퀴 측정하는 것이었다.9

과학적 인정

1830년에 피츠로이 선장은 비글호를 케이프 혼(Cape Horn) 주변으로 몰고 갔는데, 그곳은 그 당시에 아직 해도에 나타나 있지 않은 곳이었다. 그는 그 지역을 측량하여 최초의 해도를 만들었는데, 2차 대전 이후의 시기까지도 그쪽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은 그것을 이용했다.10 1837년 왕립지리학회(Royal Geographic Society)에서는 이러한 업적을 인정하여 그에게 학회의 금메달을 수여했다.

1831년 12월에, 피츠로이는 22세의 젊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과 함께 유명한 항해를 시작했다. 바다의 선장들은 매우 외롭고 고립된 삶을 살았다. 피츠로이는 주로 측량과 수로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앞으로 방문할 곳의 동식물에 대한 과학적 관찰을 할 수 있는 친구와 동반자가 필요했다. 사냥을 좋아한 다윈은(움직이는 거의 모든 것을 쏘는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짐) 또한 유능한 자연주의자였다. 그는 딱정벌레에 대한 전문가였으며, 유명한 지질학자 아담 세지윅(Adam Sedgwick) 밑에서 지질학을 공부했었다.

캠브리지 대학의 식물학 교수였던 존 헨슬로우(John Henslow)가 피츠로이 선장에게 다윈을 추천했다.11 피츠로이는 그 후 곧 다윈을 만났고, 좋아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전 세계를 돌며 항해하면서 비글호에서 5년 이상을 함께 보냈다.

성경에 대한 피츠로이의 믿음

피츠로이는 헌신적인 기독교인이었다. 항해를 시작할 때 그의 글을 보면, 그는 전 지구적 대홍수를 포함하여, 창세기의 견해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항해 중에, 특히 지질학에 대한 그의 관찰로 인하여 사라졌다.12 더욱이, 그는 성경을 매우 면밀히 읽었으며, 인류의 이동과 천문학에 대한 관찰을 통해, 창세기는 신뢰할 수 있고, 역사적으로 정확하며, 문자 그대로 진실되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13,14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날들을 문자 그대로 24시간의 하루라고 이해했던 피츠로이는, 자연과 성경이 한 목소리로 연합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당시 대학에서 널리 받아들였던, 자연과 성경이 두 개의 별개의 ‘책’이라는 베이컨 학설적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츠로이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나중에 역시 헌신적인 기독교인이었던 그의 아내 메리(Mary)를 고무시켰다.

세계를 뒤흔든 다윈의 비글호 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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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컬하게도 다윈에게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 사본을 전해준 사람이 피츠로이 자신이었는데, 그는 그 결정을 매우 크게 후회했다. 그 책은 대홍수를 거부하고 지금은 ‘장구한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창했는데, 그것이 다윈으로 하여금 반(反)성경적 가설을 끄집어내는데 필요한 빌미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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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은 다윈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였으며, CMI는 비글호의 여행에 관한 매우 높은 수준의 다큐멘터리 「세상을 흔들었던 항해」를 제작하기 위해 전 세계적으로 기금을 마련했다.

Movieguide.org는 그것을 “지금까지 제작된 최고의 제작 다큐멘터리 중 하나”라고 불렀다. 다윈의 삶과 유명한 항해의 면모를 극적으로 재구성했을 뿐 아니라, 훌륭한 현장 사진들을 통해 과학자들은 다윈을 설득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지질학적 위치와 동물들을 현대 지식에 비추어 재조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창조/진화에 대해 닫힌 마음을 소중히 열게 하는 데에, 온화하지만 강력한 방법이다! creation.com/store에서 DVD, 블루레이 또는 비디오 다운로드로 가능하며, 할인된 가격으로도 구입이 가능하다.

더 많은 인정

로버트 피츠로이는 다윈의 지원을 받아 1851년에 명성있는 왕립학회의 평의원이 되었다. 피츠로이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에서, 그는 파타고니아에서 조개의 압축된 성질을 관찰한 결과 물의 깊이가 “매우 깊어서 엄청난 압력으로 땅과 조개를 압착하거나 짓이겼으며” 퇴적물을 “응집”시킨 이 거대한 힘의 원천은 “전 지구적 대홍수”였다고 추론했다.15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외관을 관찰하면서, 그는 “머리카락과 피부색의 여러 다양성은 최초의 단 두 명으로부터 발생하였을 것”이라고 올바르게 추론했다.16 피츠로이는 사람이 동물 조상과 함께 원시 상태에서 생겨났다는 생각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다윈이 20년 후 1859년에 「종의 기원」을 발표했을 때, 피츠로이는 그의 친구가 창세기를 부정하고, 자연선택이 모든 생명의 설계와 다양성의 원인이라는 이론을 주장하는 것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피츠로이는 윌버포스 주교와 토머스 헉슬리 사이의 그 유명한(그리고 많이 잘못 알려진)17 1860년 논쟁에 출석했으며,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자기의 성경을 ‘높이’ 들고, 다윈의 책이 출판된 것으로 인해 마음이 아프며, 그 책은 사실을 논리적으로 정리한 것이라는 헉슬리의 진술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18

우울증, 자살, 그리고 용서

피츠로이는 평생 동안 여러 차례의 우울증으로 고생했는데, 이로 인하여 결국 59세의 나이에 비극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버리게 되었다. 특정한 사람의 정신건강 문제의 원인에 대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에는 유전적 특질1, 환경, 생활방식 모두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자살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할 수도 있다. 피츠로이의 자살로 인해 그리스도를 따랐다는 그의 주장이 무효화 되는 것일까? 자살은 중대한 죄이지만,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아니다. 피츠로이의 성경적 믿음에 대한 기록을 따라가 보면, 성도들이 언젠가 그를 만날 것을 기대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때는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4).

  1. E.g. bipolar disorder, which a number of scholars have claimed for FitzRoy (see e.g. Jones, S., View from the lab: journeys of the mind, telegraph.co.uk, 17 August 2005). His uncle also suicided; twin studies have shown it is among the most heritable of medical conditions, and much in his history of recurring depression (as for the great preacher Spurgeon) indicates this as a real possibility, at least.

승진과 정의로운 행동

1843년 피츠로이는 항해를 그만 두었고, 뉴질랜드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마오리 족의 권리에 대해 정당한 대우를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거기에는 그들이 원할 경우 그들의 토지를 매매할 때 최대한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이 일로 인하여 적이 생겼다.19,20,21

그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피츠로이는 기상청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선장이었을 때, 그는 바다에서 생명을 구하는 수단으로 일기예보에 대한 지식을 쌓게 되었다. 피츠로이는 케이프 혼(Cape Horn) 주변의 폭풍에 대한 관찰과 경험을 바탕으로, 신뢰할 수 있는 기압계를 설계했으며, 날씨 변화를 예측하는 설명서인 ‘날씨 책(Weather Book, 1858년에 처음 출판 됨)’을 썼다.22

후회와 회한

피츠로이는 그의 삶에서 많은 후회와 회한을 갖고 있었다. 그 주요 원인은 그가 비글호의 선장으로 있을 때, 다윈의 진화론이 확산되는 데에 원치 않게 기여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분명 다윈의 진화론은 엄청난 수의 사람들로부터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빼앗아갔다.

다윈의 유명한 항해였던 비굴호의 선장으로서의 역할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간과되고 있지만, 그의 상당한 업적들과 고귀했던 성품들에 대한 증거들을 상기하는 것이 좋겠다.

폭풍 예보 시스템

피츠로이는 북대서양의 기상 패턴을 기록하면서, 멀리 떨어진 배에서 볼 수 있는 해안의 기둥이나 돛대에 내건 시각적 통신 수단을 사용하여, 폭풍 경보 시스템을 개발했다. 그의 시스템은 배에게 위험한 바람이나 질풍을 경고하기 위해서, 삼각형, 정사각형, 원추형 및 원통형 내부에 빛을 사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새로운 시스템을 먼저 프랑스에서, 그리고 뒤이어 다른 나라들도 받아들였다.

이 친절하고 관대했던 사람 로버트 피츠로이는 결과적으로 많은 생명들을 구할 수 있었고, 이 사실로 그는 기뻐했을 것이다.23

참고 문헌및 메모

  1. Barlow, N. (ed.), The Autobiography of Charles Darwin, Collins, London, 1958, p. 72. 텍스트로돌아 가기.
  2. Gribbin, J. and Gribbin, M., FitzRoy: The Remarkable Story of Darwin’s Captain and the Invention of the Weather Forecast, Headline Book Publishing 2004, p. 290. 텍스트로돌아 가기.
  3. Thomas, L., My World of Islands, Kindle Edition, 2011. 텍스트로돌아 가기.
  4. MacQuarrie, K., Life and Death in the Andes, Simon & Schuster Paperbacks, 2015, p.346. 텍스트로돌아 가기.
  5. Ref. 2, pp. 21–23. 텍스트로돌아 가기.
  6. Ref. 4, pp. 346–347. 텍스트로돌아 가기.
  7. Ref. 2, pp. 48–49. 텍스트로돌아 가기.
  8. See captaincooksociety.com/home/detail/endeavour, accessed 24 March 2017. 텍스트로돌아 가기.
  9. Ref. 2, pp. 53, 84–85. 텍스트로돌아 가기.
  10. Ref. 2, p. 62. 텍스트로돌아 가기.
  11. Ref. 2, pp. 96–97, 텍스트로돌아 가기.
  12. Sibley, A., FitzRoy, Captain of the Beagle, Fierce Critic of Darwinism, Acts & Facts 34(11), 2005, www.icr.org 텍스트로돌아 가기.
  13. Ref. 2, pp. 189–190. 텍스트로돌아 가기.
  14. Herbert, Sandra, Charles Darwin: Geologist, Cornell University Press, 2005, pp. 190–192. 텍스트로돌아 가기.
  15. Fitzroy, R., King, P., and Darwin, C., Narrative of the Surveying Voyages of His Majesty’s Ships Adventure and Beagle Between the Years 1826 and 1836: Describing Their Examination of the Southern Shores of South America, and the Beagle’s Circumnavigation of the Globe, 1839. This was a three volume work; Fitzroy was principal author and editor of the first two volumes, accessible online at archive.org. See also ref. 14, p. 191. 텍스트로돌아 가기.
  16. Ref. 15, pp. 641–645, accessed 25 March 2017. 텍스트로돌아 가기.
  17. See creation.com/wilberforce-huxley. 텍스트로돌아 가기.
  18. The report was in the magazine Athenaeum, quoted in Ref. 14, p. 192. 텍스트로돌아 가기.
  19. Ref. 2, p. 208. 텍스트로돌아 가기.
  20. See nzhistory.govt.nz/people/robert-fitzroy 텍스트로돌아 가기.
  21. Harris, P and de Cogan, D. (eds), Studies in the History of Tax Law, Vol. 7, p. 323. 텍스트로돌아 가기.
  22. Ref. 2, pp. 256–258. 텍스트로돌아 가기.
  23. Ref. 2, pp. 263–265. 텍스트로돌아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