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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복음주의 (창조의 타당성 제 2부)

번역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번역: 한국어창조과학회 (creation.kr)

http://creation.or.kr/library/itemview.asp?no=548

창조 복음주의 (창조의 타당성 제 2부)

(Creation Evangelism (Part II of Relevance of Creation))

에 의해

주 님은 왜 세계적인 규모로 창조과학 선교를 일으켰을까? 그런 조직이 왜 중요할까? 창조과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진화론을 박살내는 일을 우리한테 맡기시려는 것뿐만이 아니고, 우리 사회 안에 복음을 수용할 수 있는 기초를 다시 복원하시려는 것도 주님의 목적이라는 것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교회가 사회 속으로 창조 복음운동을 전개하려 할 때면, 인본주의 철학이라는 역류와 맞닥뜨릴 뿐만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이교에 물들어가는 문화 속에 뿌려진 우상숭배의 씨앗들이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진화론과 사회

오 늘날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동성도착행위의 증가, 임신중절행위에 대한 지지율의 증가, 권위에 불순종하려는 사람들의 증가,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 옷을 벗으려는 사람들의 증가, 포르노 음란물들의 증가, 등등 어찌 이런 현상들뿐일까! 우리는 또한 이런 것들도 알게 된다. 즉, 교회는 예전처럼 효과적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크리스천들은 자유를 유지하기 위하여 싸우고 있다. 그러나 몇 년 전만 해도 이러지 않았다. 복음운동가들은 예전에 받았던 반응들을 이제는 더 이상 받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예전처럼 자진해서 자녀들을 주일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교육제도는 더 이상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교회들은 신도 수가 유지될 정도이거나, 아니면 문을 닫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교회부흥이 극적으로 일어난 경우는 거의 없다. 무디 (Moody)는 생전에 자기 주일학교에 수천을 헤아리는 학생을 더 받았었지만, 오늘날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만 하여도 비웃고, 복음에 열린 마음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오늘날 수없이 많은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창조에 대한 믿음이 사회의 기초였다. 각급 학교와 대학교에서 창조의 믿음을 가르쳤다. 창조신앙의 기초는 절대적 가치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규범을 만드시는 권리를 가지고 계셔서, 우리들에게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해 주신다는 믿음이다. 사람들은 주일학교에서 이러한 기독교적 절대 가치를 가르쳐주기 때문에 자진해서 자녀들을 주일학교에 보냈었다.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도 전반적으로는 성경에 기초한 이러한 율법들을 인정하고 준수하였다. 동성행위자들은 투옥되었고, 임신중절은 살인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찰스 다윈이라는 사람으로 인해서 사기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가 자연선택과 종의 변이 문제에 어느 정도 공을 세웠던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조부로부터 배웠던 진화론적 이념을 적용시켜 과거에 관한 학설을 창출해내기 위하여 모든 사실들을 의도적으로 하나로 묶으려하였다. 그런 다음 다윈은 진화론 학설을 일반화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이론을 그대로 믿게끔 오도하였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크리스천들도 진화론에 속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신앙이다. 교회는 그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옳은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들통났다고 해야 옳다. 많은 사람들이 속아서 진화론을 과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론은 우리 사회에 만연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 같이 사람은 죄 많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자.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인본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빛보다는 어둠을 사랑한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이런 이유로 인해서 우리한테는 옳은 것보다는 그른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플레이보이 잡지와 성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사람이 어떤 쪽을 집어들고 읽는가를 지켜보면 누구라도 이런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지 난 수 세기 동안, 비-크리스천들은 진화론 사상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신념체계로 쉽게 수용하였다. 그들은 우리도 과거도 현재도 우연의 존재라고 우긴다. 예컨대 우리를 소유하는 존재는 없다. 그래서 우리 자신은 우리가 소유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람이란 어떤 누구한테도 복종할 의무가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상이 사회 속에 확고히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묻기 시작하였다. 즉, '만약 진화론이 진리고 창조주인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혼에 관한 법률은 왜 있는가? 성적 탈선행위를 규제하는 법률이 왜 있는가? 우리가 옷 벗기를 원하면서도 왜 옷을 벗을 수 없는가? 왜 우리는 임신중절을 해서는 안 되는가? 여하튼 태아를 죽이는 행위는 필요하지 않는 동물을 제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다시 말해서, 진화론의 신념체계가 사람은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기 때문에 원한다면 무엇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인본주의 도덕률의 기초로 제공해주었다. 그래서 더 이상 옳고 그른 기준은 없었고, 또 현재도 없다고 주장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근본적인 대결은 창조신앙에 기초를 둔 기독교 신앙, 즉 절대론과 '모든 것은 우연이' 라고 주장하는 진화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인본주의적 종교관, 즉 상대적 도덕률과의 사이에 벌어지는 대결이다.

이 두 체계 중 어느 하나가 결국에는 다른 하나를 압도하고 퇴출시키게 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오랫동안 사이좋게 공존할 수는 없다. 창조신앙이 사회의 기조를 이루고 있을 때에는 임신중절 지지자와 포르노 산업 지지자들과 같은 부류들, 다시 말해서 절대 가치를 부인하는 자들이 형무소로 갔었다. 그런데 진화론이 우리 사회의 기조로 수용된 이 마당이고 보면, 과연 앞으로는 누가 형무소행이 될 것인가? 성경의 절대적인 말씀들을 순종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리들이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은가?! 이 말은 결코 과장된 한탄이 아니다. 만약 현재 우리 사회의 진행방향에 그 어떤 변화의 계기를 가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여러 가지 입법안들이 그러한 추세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현 재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루마니아의 최대 성결교회의 목사였던 요셉 톤 (Josef Ton)은 1982년 4월 15일, 목요일자 호주의 크리스천 신문 'New Life'에 이렇게 진술하였다. '서유럽의 기독교가 파괴된 것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 중 하나는 진화론이고, 나머지 하나는 자유주의 이론이…자유주의 이론은 성경과 우리의 신앙에 적용된 진화론 바로 그것이다.'

제임즈 헬피와 마르티 헬피 (James and Marti Helfi)의 저서 'By Their Blood-Christian Martyrs of the 20th Century' (Most Media 판)의 49쪽과 50쪽에 보이는 해설을 한 번 읽어볼 가치가 있다.

'서방세계로부터 유입되던 새로운 철학과 학설들은 기독교에 대한 중국인의 신앙을 좀먹고 말았다. 소위 주류 개신교 교파들의 물결은 진화론을 가르치면서 성경의 초자연성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감리교파, 장로교파, 조합 교회주의자파, 그리고 북침례교파가 특히 타격을 받았다. 영국의 버트런트 러셀 (Bertrand Russel)은 무신론과 사회주의를 설교하였다. 그와 같은 선생들의 파괴적인 저서들은 정통 기독교 교리를 훼손하였다. 그 결과로 정통 복음 선교단들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던 중국의 지식인층들은 마르크스주의의 등장에 취약한 체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진화론은 교회와 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은 이 사실에 눈을 크게 떠야 한다!

바울과 희랍인들

자, 그러면 이 일을 위해 무엇을 하여야 하겠는가? 주님은 대단히 강력한 도구를 마련해 주셨다 ━ 그것은 바로 창조 복음운동이다. 오늘날 교회가 예전에 비해 그토록 비능률적이 된 주요 이유는 교회가 펼치고 있는 복음전도 방법이 옳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교회는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뜻을 선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전처럼 효과적이 아니다. 이 점에 관해서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 14장과 17장에 희랍인들한테 벌렸던 복음전도 운동에서 두 가지 특별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유태인들한테 벌렸던 전도운동과는 사뭇 달랐다. 바울이 그리스로 전도 여행을 떠났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고 창조주이신 참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거기서부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다. 희랍인들은 일종의 진화론을 신봉하고 있었던 것이기에 그들은 자기 자신들 위에 권능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몰랐다. 우리는 또한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23)에서 이교도들(희랍인들) 한테는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십자가의 설교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태인들한테는 그것은 장애물이었다.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면, 우리는 왜 바울이 희랍인들한테는 창조론적 기초 위에서 접근하였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희랍인들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지 않고, 그 대신에 일종의 진화론적 형태에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잘못된 기본을 갖게 하였던 것으로서, 이 세상에 대한 사색을 잘못된 틀 속에 묶이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십자가의 설교는 그들한테는 순전한 엉터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희랍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전에 복음을 설교할 수 있는 바탕을 그들 속에 마련하여야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선교의 기초로 창조의 메시지를 먼저 설교하였다. 거기서부터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메시지를 설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태인들에게 설교를 할 때마다 그는 창조의 메시지보다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가르침을 먼저 설교하였다. 유태인들은 이미 올바른 기초가 되어있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사고의 올바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으니 어쩌겠는가!

지금이야말로 교회는 각성하고 예전에는 유태인들의 사회와 같았던 우리 사회가 더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희랍인들의 사회처럼 되어버린 사실을 직시하여야 할 때이다. 예전에는 창조사상이 우리 사회의 기초에 자리하고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도하는데 크고 긍정적인 반응을 효과적으로 거둘 수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그 기초가 거의 무너져버리고 그 자리에 진화론 사상이 차지하고 들어앉은 꼴이 되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교할 수 있기 전에 먼저 창조메시지의 기초를 구축하여야 할 것이다 ━ 복음을 온전히 세울 수 있는 기초가 그것이다.

우 리는 다량의 신약성경과 시편, 그리고 잠언을 배포하는 전도가 유행처럼 되어버린 사실을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에 이들의 선교활동에 창세기 1장에서 11까지도 포함되어 있다면, 바울이 사도행전 14장과 17장에서 사용하였던 것과 같은 뜻으로의 복음전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 중에서 이 부분을 읽었던 사람들의 삶에 복음전도의 효과가 더욱 크게 나타날 것을 믿는다.

복음전도의 방법

우 리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것, 회개의 필요성, 그리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모든 결과는 성령님에게 일임하는 것으로 설교는 충분하다고 느끼는 크리스천이 많다. 그렇지만 초기의 복음전도자들은 전도 대상에 따라 설교를 다르게 하였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실예들이 사도행전과 복음들 속에 잘 나타나있다.

요한 4장 -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생명수'를 사용하였다.

사도행전 2장 - 베드로는 설교를 오순절 날에 있었던 사건들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였다.

사도행전 3장- 베드로는 일으켜 세워주었던 절름발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게 하였다.

사도행전 7장 - 스데반은 유태의 산헤드린 (Sanhedrin) 평의회에 역사를 교습하였다.

사도행전 17장 - 바울은 이방인 (희랍인)에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해 설교하였다.

주 님은 창조과학 선교를 세계적인 규모로 펼치시어 우리 사회의 복음화를 위해 필요한 도구가 준비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들 하나님의 권속들이 창조신앙을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때엔 우리들은 이웃에게 효과적인 진리 전도 방법을 소홀히 취급하였던 결과로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창조과학을 이용한 전도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도방법에 속한다고 믿는 우리의 입장이다━창조과학 전도는 기독교 교리를 떠받치고 있는 기초에 관계하기 때문이다━문제는 그 기초가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 제거된 채로 있지 않은가!

우리가 이 메시지를 호주와 미국, 그리고 여타 다른 지역에서 선교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 곳 사람들에게 창조(Creation)와 같은 창조선교 자료들 배포하였다. 그들도 창조론 분야에 관한 문제로 다른 사람들에게 도전할 때 이 자료들을 사용하였던 결과로 상대방들이 복음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게 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예전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이 나올 때면 그냥 조소로 대응하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창조 복음전도가 효과를 나타난 것이다.

씨뿌리기와 추수

씨 뿌리는 자의 우화를 생각해 보자. 씨가 자갈밭이나 가시밭에 떨어졌을 때, 씨는 싹을 내어 자랄 수 없다. 씨는 준비된 토양에 떨어졌을 때에만 자랄 수 있다. 우리는 씨를 뿌린다, 복음을 상징하는 씨다. 우리가 뿌린 씨가 진화론 철학이라는 가시밭 토양에 떨어지고 있다. 우리가 뿌린 씨가 동일과정론 지질학이라는 자갈밭에 떨어지고 있다. 우리가 뿌리는 씨는 준비된 토양이 필요하다. 창조 전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온전히 밭을 갈아서 파종과 추수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우리 교회가 사회로 나아가 창조 전도를 시작한다면, 그 결과는 어떨까? 한 번 상상해보자! 창조전도는 교회부흥에 기여할 수 있는 전도의 방법 중의 하나로 기대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새로운 교인이 교회를 찾아오면, 제일 먼저 성경 중에서도 창세기를 읽을 것을 권해야 옳다. 그래야만 새 교인은 기독교에 관해 모든 것을, 특히 기독교 교리의 기본에 관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렇다고 오늘날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설교만 가지고서는 아무런 결과도 거둘 수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 속에 기독교 창조 신앙의 잔영이 아직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직은 우리 사회 속에 하나님이 지존한 존재이시고, 성령님은 인간의 전도사역의 실패여부에 의해 전혀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창조 신앙의 잔영도 매우 빠르게 사라지고 있어서, 사회의 반응은 예전 같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는 분연히 일어나서 옛 희랍사회처럼 되어가는 우리 사회에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도구를 사용하여서 기독교 교리의 기초가 온전히 회복되어, 교리의 구조가 건전하게 설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오 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런 주장들이 들린다. 즉, '당신은 모든 종교의 교리와 신앙 그리고 활동의 자유(tolerance)를 인정하여야 한다.' 이 말에 이렇게 대응하는 크리스천의 말도 들린다. 즉, '나도 그래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여야 한다.' 호주에는 '신앙의 자유 (Toleration)' 라고 호칭되는 단체가 있다. 그들의 주목적은 호주 안에서 모든 종교의 교리와 신앙, 그리고 활동의 자유를 신장하는데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반대하는 내용을 일일이 내걸었다. 예컨대, 그들은 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치는 것을 반대한다. 모든 종교의 교리와 신앙, 그리고 활동의 자유라고 하는 그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들의 행동은 절대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는 '나는 길이요' 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여러 길 중의 하나의 길을 뜻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나는 진리다' 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진리로 가는 여러 가지 다른 길과 수용할만한 여러 가지 접근 방법 중의 하나라는 뜻이 아니다. 만약 누구라도 절대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 리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것은 창조론 대 진화론의 대결이라는 과학에 관한 학술적인 토론에 한정된 대결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기독교 교리의 창조론적 기초 위에서 표방하는 절대 가치론을 위해 진화론에 기초를 두고 있는 인본주의의 상대론적 도덕률과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서로 다른 두 종교 간의 싸움이다. 그리고 그 싸움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속아서 인본주의 종교의 기초가 과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 진화론은 과거에 관한 일종의 신념체계다. 그들은 그들이 세운 이 신념체계를 이용하여 세상에 그 어떤 기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원하는 것이면 어떤 것도 할 수 있으며, 우리를 지배하는 왕이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우리를 지배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인본주의 종교를 정당화한다. 이런 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충돌이다. 이것이 우리가 싸우려는 대상이다.

그 런데 우리는 바울이 일러준 일을 해낼 준비가 되었을까? 분연히 일어서서 성경의 가르침을 죽기로 지킬 각오가 되어 있을까? 우리는 지금 여러 대학교에서 교수들이 교수하는 내용에 분연히 반대할 준비를 다 갖추었을까? 교수들이 그들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일어섰을 때 그들이 하나님에게 역행하는 편견을 가진 죄 많은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베드로후서 3:3-7은 흥미있는 예언으로, 말세에 사람들은 진리를 '부러 잊으려' 할 것이라고 하였다━그들은 그 어떤 증거를 대어도 진리를 고의로 거부하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그들이 자진해서 다음의 세 가지를 거부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1) 창세에 지구는 물에서 나와 물로 덮였었다━창세기에 기록된바 그대로다. (현대 지질학은 지구가 용해된 덩어리 [molten blob] 이던가, 그와 비슷한 고체형으로 시작되어 지구가 완전히 냉각되기 전 수 백만년 동안은 물이 없었다고 한다.)

(2) 지구는 노아의 홍수 당시 물로 덮였었다. (현대 지질학은 물론 수많은 교회들까지도 지구 역사상 전 세계적인 규모의 대홍수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한다.)

(3) 장차 불로서 내리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인류의 멸종은 태양의 냉각으로 인한 지구의냉각으로 될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만 약에 현대 지질학이 역사상 전 세계적 규모의 대홍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사실로서 인정한다면, 그들은 성경이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그들도 예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였던 것처럼, 다음에는 불로써 심판하실 것이란 예수님의 가르침을 수용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증거가 아무리 확실해도 일부러 (혹은 고의로) 진리를 모르려고 한다. 그래서 이 싸움은 증거에 관한 싸움이 아니고, 믿음의 싸움이다.

이 창조의 메시지가 전파됨에 따라서, 사람들은 이 메시지가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왜 무법행위와 동성애가 발호하는지, 왜 임신중절 지지자들이 임신중절을 지지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제는 이러한 사회악들이 발호하는 이유를 알게 된 이상,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 열쇠를 가진다는 것은 문제에 대한 접근방법을 알아내는 도구가 마련되었다는 뜻이다. 창조의 메시지야말로 진정으로 강력한 도구가 아니겠는가! 우리들의 주된 목적은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가능한 한 많은 비-크리스천들은 물론 크리스천들한테 이 창조의 메시지를 전파하는데 열과 성의를 다 해야 할 것이다.

출처 : Creation 6(2):17, November 1983

번역자 : IT사역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