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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과 트로츠키의 관계

저자: Barry Woolley
번역자: 한국어창조과학회 (creation.or.kr)

Wikimedia Commons LeonTrotsky
Leon Trotsky embraced revolution and killing … and died from a blow of an ice axe delivered by an assassin.

레온 트로츠키 (Leon Trotsky) (1879-1940)는 1917년의 혁명에 뒤이어 러시아의 정권을 탈취한 공산당의 조직, 선전, 그리고 군대를 총괄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독재자 레닌의 후계자로 있다가 마침내 스탈린으로부터 그 자리를 박탈당했다. 대범하지 못한 도량에 재치 없고 성급한 성격의 트로츠키는 마르크스주의에 무한한 믿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다윈의 사상 때문에 그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더욱 견고해졌다.

마르크스주의와 다윈의 사상에 대한 그의 광신에 가까운 신념과 무산계급의 적(敵)에 대한 그의 분노는 러시아 내전 (1918-1920)의 와중에서 태어난 소비에트의 적들을 괴멸시키기 위해 붉은군대 까지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그는 노동자의 군대화 (軍隊化) 농민의 식량 징발을 제도화하였다. 그는 무정부주의자 네스토 마크노 (Nestor Makhno) (1889-1934)가 이끈 우크라이나의 반란 농민 게릴라군을 괴멸시켰다. 결국 마크노는 중상을 입고 가족들과 함께 국외로 도주했다. 마크노는 볼셰비키가 백계 러시아 군과 대결하고 싸울 때 트로츠키와 동맹 관계에 있었던 사람이다. 트로츠키는 크론스타트 (Kronstadt)1에서 소비에트의 수병 (水兵)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폭력을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그러한 그의 잔학행위는 ‘프로레타리아트를 옹위하기 위한 것이며, 불퇴전 (不退轉)의 혁명 목적 기여한다는 절대적 확신’ 때문이었다.2

러시아 내전의 종식 이후에도, 트로츠키는 정력적으로 행정부의 세부 업무와 ‘신(神) 없는 사회’의 지도자 과업을 수행했다. 이 단체는 소비에트에서 무신론을 선전하는 과업을 책임지고 있었다. 열렬한 무신론자였던 그는 ‘종교를 무신론으로 대체 (代替)하라‘고 주장했다. 이 목적을 위한 과업으로 종교의식 대신에 연극을 이용하고, ‘붉은’ 세례, ‘붉은’ 결혼, ‘붉은부활제’ 같은 것들을3 권장했다. 그는 크리스쳔들을 핍박하고, 교회의 신성 (神性)을 모독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중산계급의 도덕심을 증오하기에 이르렀다.

트로츠키는 불퇴전의 혁명운동을 세계적 규모로 확대하라고 주장했다.4 그리고 독일을 비롯해서 폭력적 혁명의 기운이 성숙하였다고 생각되는 여러 나라에서 공산당은 정권을 쟁취하라고 부르짖었다.

부유한 유태인 지주5의 아들로 태어난 트로츠키가 어찌 되어서 자기 아버지가 속한 사회계급과 종교에 그토록 악의적인 편견을 품게 되었을까? 그것은 실패한 그의 대학 생활과 비정상적인 그의 여성문제와 크게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이 17살에 어느 혁명 단체 (revolutionary commune)에 참가하기 위해 대학을 중단했다. 이 단체의 조직원들 가운데 유일한 공산주의자 알렉산드라 르보나 소코로브스카야 (Alexandra Lvona Sokolovskaya)는 그보다 6살 연상의 여자이었다. 처음에 그는 그녀는 물론 그녀의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을 맹렬하게 비난했었다. 심지어, 1896년 신년 만찬 모임에서 그는 ‘살아있는 모들 것을 어렵고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저주를!’이라고 말하며 건배를 제의한 적도 있었다.6

그러나 그는 곧 그녀와 정분이 나고 말았다. 그 일로 해서 그는 그녀의 마르크스 사상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단체가 추진한 사회운동으로 말미암아 결국 조직원들은 제정 러시아의 형무소7에 수감되는 죄수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수감 생활 동안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자기 사상을 개발하는 기회로 삼았다.

오뎃사(Odessa)의 형무소 감방에서, 트로츠키는 다윈의 종의 기원과 그의 자서전을 정독했다. 그런지 수 년 후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다윈은 나한테 남아있던 마지막 이념적 파편들 마저 무너뜨려 버렸다. … 오뎃사의 형무소 감방에서 나는 과학이라는 견고한 기초 위에 우뚝 선 나 자신을 발견했다. 사실 (事實)을 어떤 확실한 체계 속에서 스스로를 세우기 시작했다. 진화론과 결정론 (determinism)이라는 이념 즉, 점진적 발전은 물질 세계의 특성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는 이념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고 말았다.”

“나에게 있어서 다윈은 거대한 우주라는 사원의 출입문을 지키고 서있는 위대한 문지기와 같은 존재였다. 나는 그의 세밀, 정확, 정직 그리고 동시에 강력한 사상에 취하고 말았다. 나는 그의 글, 즉 그가 신에 대한 신앙8을 견지하고 있다는 글을 일고 경악했다. 나는 종의 기원은 자연의 선별 (選別)에 의해 그리고 성(性)적 선별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이론을 세운 사람도 신에 대한 신앙을 한 머리로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9

세부 내용은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자. 어쨌거나 기독교 창조 이론가인 제임즈 클러크 맥스웰 (James Clerk Maxwell)이나 루이 파스퇴르 (Louis Pasteur)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의 시대에 산 트로츠키가 마르크스와 다윈의 이념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이상하였다. 그의 사상 전향의 경험은 순수하고도 철저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 사상 전향이 물려준 유산은 그의 손에 의해 흘린 소용돌이치는 유혈로 기록되었다.

1940년, 멕시코에서 생활하고 있던 트로츠키는 이 또한 다윈을 탐독하고 무신론적인 인생관으로 전향한 죠셉 스탈린 (Josef Stalin)의 지령을 받은 자객의 손에 의해 암살 당했다. 스탈린은 아마도 역사상 최대의 대량 학살자 일는지 모른다. 스탈린이나 트로츠키는 그들의 사상적 전제 (前提)에 충실하게 일관된 행동을 했다: 만약 나를 창조한 자가 없다면, 나를 지배할 자도 없다. 그리고 절대 정(正)?오(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그와 같은 진화론적 세계관에서 조망하면, 사람들을 살해하는 일이, 심지어 그게 수백만을 헤아린다 해도, 본질적으로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BARRY WOOLLEY, M. S.

Barry Woolley는 연구기계공학자 (Research Mechanical Engineer)로서 운동의 양극항등식 (plate equations of motions)과 소리와 구조의 상호작용 (interaction of sound and structures) 분야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주제들에 관한 문서를 미국 음향학회 (Acoustical Society of America)의 간행물 (Journal)에 발표하였다.

참고 문헌및 메모

  1. 크론스타트 (Kronstadt)는 페트로그라드 (오늘날의 성-페테스브르그)의 앞바다에 위치한 도서에 서있는 군항으로서 20,000 명의 수병이 주둔하고 있었다. 1921년 3월 그 수병들(그들 가운데 농민의 아들이 많았다)은 자기네 부모들이 당한 알곡 도난 사건에 대해 항의하고 또 근로자의 자유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봉기하였다. 트로츠키의 명령을 받아, 백색 제복으로 위장한 붉은군대는 빙판 위를 횡단하여 해군 기지를 함락한 후 수병들을 학살하였다. 텍스트로돌아 가기.
  2. Woolley, B. L., Adherent of Permanent Revolution: A History of the Fourth (Trotskyist) International, University Press of America, Lanham, Maryland. p.2, 1999. 텍스트로돌아 가기.
  3. Heller, M., Cogs in the Soviet Wheel, London, p.204, 1988. 텍스트로돌아 가기.
  4. '전쟁은 혁명과 마찬가지로 협박에 근거를 두고 수행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군대는 패배한 군대의 어느 부분만을 괴멸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다. 그렇게 함으로써 적군의 나머지 부분을 겁먹게 하고 또 그들의 의지를 꺾는 호과를 얻어낸다. 혁명도 같은 수법으로 과업을 추진한다. 혁명은 몇 사람만을 죽이고 수천 사람을 겁먹게 한다.‘ 라고 그는 기록했다. Ref. 3, p.119, which quotes Trotsky, L.,Terrorizm i Kommunizm, Moscow, 0. 57, 1920. 텍스트로돌아 가기.
  5. 트로츠키는 Lev Davidovich Bronstein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나중에 그는 Odessa의 감방에서 동료들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을 자신의 혁명 아호 (雅號)로 취해 사용하며 자기가 유태 출신아란 사실을 감추었다. 텍스트로돌아 가기.
  6. Carmichael, J., Trotsky: an Appreciation of his Life, Hodder and Stoughton, London, p. 43. 1975. 텍스트로돌아 가기.
  7. 트로츠키와 알렉산드라가 동부 시베리아로 4년간의 유배형을 선고 받은후, 1900년 모스크바를 통과하는 어느 이송 (移送) 형무소의 감방 안에서 유태인 군목의 주례로 그들은 결혼했다. 시베리아에 있는 동안 그녀는 그의 두 딸을 출산했다. 그리고 그녀는 1938년 사망할 때까지 브론스타인 부인 (Mrs. Bronstein)이란 이름을 고수했다. 그녀의 도움 (그녀는 며칠 동안 병상에 누어 ‘환자’ 마네킹을 품고 있었다)으로 그는 그곳을 탈출하여 1902년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그는 나탈랴 이바노브나 세도바 (Natalya Ivanovna Sedova)를 만났다. 그녀는 나중에 그의 정부가 되었다. 비록 알렉스산드라가 법적으로 결혼한 트로츠키의 아내였지만, 나탈랴는 ‘트로츠키 부인’으로 행세하면서 그의 두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1904년 그가 죽을 때까지 그와 동거하였다. 텍스트로돌아 가기.
  8. 다윈의 종의 기원의 마지막 단락에서 언급한 ‘창조주’에 대한 그의 생각, 그리고 다분히 영국 목사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 2판에서 6판에 걸쳐 추가로 언급한 그의 ‘창조주’에 대한 생각 때문에 트로츠키는 다윈을 오해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아무튼 다윈은 그의 나이 40에 가서 기독교를 포기 하였던 것이다. See Brentnall, J. Grigg. T., Darwin's slippery slide into unbelief. Creation 18 (1): 34, 1995. 텍스트로돌아 가기.
  9. Eastman. M., Trotsky: A protratit of his Youth, New York, pp. 117-118, 1925. 텍스트로돌아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