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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사상, 모든 게 그 집안 내력이다

다윈은 진화론을 할아버지 에라스므스로부터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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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이

저자:
번역자: 한국어창조과학회 (creation.or.kr)

많 은 사람들은 (신학 학위를 취득한) 찰스 다윈이 1835 년에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자연의 사실들'을 관찰하면서 그 어떤 편견도 없는 자연주의자로 진화론 사상에 눈뜨기 전까지, 기원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였던 사람으로 알고 있는 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심각하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진화의 개념은 그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므스 다윈이 1770년에 처음으로 제시했을 때부터1, 꾸준히 그의 가족들 마음 속에 맥을 이어왔던 것이다.

우 리가 한결 같이 지적하는바 이지만, 창조론자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증거를 진화론자들이 가지고 있는 증거는 단 한 건도 없다! 중요한 것은 증거들을 해석하는 관점이 어떤 것인가에 달려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인간의 사상이 그 해석의 관점을 결정한다. 찰스 다윈도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즉, ”관찰이 뜻있는 관찰이 되려면 뭔가를 지지하든가 반대해야 하는 건데,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가!”2

그 래서 우리는 찰스 다윈이 1831년 비글 호를 타고 탐사항해를 출발하려 할 때의 그의 사고방식은 어떤 영향에 물들어 있었는가에 관해서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해서 그는 관찰된 사실을 진화론적 시각으로 해석하기를 원했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열쇠는 그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므스의 믿음, 저술, 그리고 역할까지 돌이켜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과학자, 발명가, 그리고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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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라스므스 다윈

에 라스므스 다윈 (Erasmus Darwin, 1731~1802)은 당시 아주 박학다식하고, 열정적인 과학자요 발명가들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현대 식물학의 기본이 되는 식물도감을 설계한 칼 랭노(Carl Linnaeu, 1707~1778)의 라틴어 판 저작물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대대적인 사역을 완결했다. 수많은 그의 발명품들 가운데에는 발성기, 복사기, 그리고 후대에 자동차에서 이용하는 마차의 방향조정 장치들이 포함되어있다. 사실상, ”현대의 발명품들 치고 에라스므스 다윈이 시작하지 않았던 게 없었다. 진화론에서부터 우생학까지, 비행기에서부터 잠수함, 방부제에서 정신분석, 발성기에서 전화기까지 어느 하나 그가 예견하지 않았던 개념은 없었다.”3

그 는 1756년부터 리치필드(Lichfield)에서 좋아서 선택한 의사 직업을 시작했다. 다른 의사들이 포기했던 그 지방 어느 유지의 젊은 아들의 생명을 구했을 때부터 한 사람의 의사로서 그는 명성을 얻었다. 그의 치료방법이 유행하는 방법과는 다르게 빈번하게 쓰였던 때문에, 그의 진료 범위가 영국 미드랜드(Midland) 지방 전역으로 점점 확대되어갔다. 영국 왕 조지 3세가 그를 런던으로 초빙하여 왕의 주치의로 부임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에라스므스는 거절했다.

1776 년 경에 그는 동료들과 함께 ‘루나 소사이어티(Lunar Society)’를 발기했다. 이것은 당대의 위대한 과학자, 산업주의자, 그리고 자연주의 철학자들의 사교 클럽이었다. 그것은 '산업혁명의 싱크 탱크' 라고 불렸다. 그것은 ‘로얄 소사어티(Royal Society)‘를 뒤쫓을 만큼 유명한 18세기 영국 과학자들의 모임이었다. 회원으로서는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왓트(James Watt), 산소를 발견한 조셉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기체 등불을 발명한 읠리암 머독(William Murdock), 위대한 도예가 조시아 웨지우드(Josiah Wedgwood), 그리고 부유한 기업가 사무엘 갈톤(Samuel Galton) 등이 있었다. 이 협회에 연결된 미국 사람으로서는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과 벤자민 플랭크린(Benjamin Franklin) 등이 포함된다.

식도락가, 자유 사고 예찬자, 그리고 시인

음식 (특히 과일, 설탕, 크림, 그리고 버터) 에 대한 그의 사랑은4 운동에 대한 그의 혐오감과 잘 대조된다. 그의 나이 46세에 그의 비만증은 극에 달해서, 식탁을 마주했을 때에는 그의 배 둘레에 맞게 식탁을 반달 모양으로 도려내어야 했다. 두 번 결혼한 그는 12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이혼과 재혼 사이에 그는 그냥 미스 파커(Miss Parker)로만 알려진 어느 여성과의 사이에 낳은 두 딸이 있었다. 이 소녀들도 그의 자녀들과 함께 그의 집안에서 자랐다. 그리고 이들은 나중에 여성교육에 관한 에라스므스의 오랜 행로의 영감(inspiration)이 되기도 했다.5

에 라스므스는 반기독교인이고, 반노예주의자였으며, 동시에 미국 독립운동과 프랑스 혁명 지지자였다. 특출한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자주 자신의 의견이나 과학적인 관념들을 음문으로 기록하곤 했다. 그런 그의 글 중에서도 가장 괄목할만한 것은 식물 정원 (The Botanic Garden, 1789년과 1791년에 출판한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으로서 압운(押韻)이 완벽한 4,384 행에 달하는 2 행 연구(聯句)시다. 그리고 1803년에 출판된 그의 유고 작품 자연의 사원(The Temple of Nature) 이 있다.

”차가운 물속 아가미가 숨쉬는 폐를 만들고,
끈적거리는 혓바닥에서 공기의 소리가 흐른다.”6,7

진화론과 에라스무스

에라스무스는 처음으로 진화에 관한 관념을 피력했을 때가 1770년이다. 그의 가족 문양은 세 개의 조가비를 특징으로 그려 넣었는데, 이에 그는 라틴어 단어 'E Conchis omnia' 를 기입해 두었다. 모든 것은 조가비(shells)로부터 왔다는 뜻이다. 그는 자기 이론을 '아무도 모르게' 공포하기 위해서 자기 마차에 이 모토를 그려 넣어 두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목격했다. 리치필드(Lichfield) 사원의 평의원 소워드(Seward)는 그 나름의 풍자 시구를 쓰고 불평하기를, 다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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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amus Darwin’s bookplate with three scallops on the diagonal. In 1771 he added the words ‘E conchis omnia’ (everything from shells) to demonstrate his belief in evolution.

”…자기를 지은이를 절연하고는
무의미한 물질로 모든 의미를 만들고 있네.
과시 대마술사가 아닌가! 주술을 읊어,
조가비에서 만물이 태어날 수 있게 할 수 있다든가.”8

부자 고객들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고 에라스므스는 자기 마차에 각인된 그 모토를 페인트로 색칠하였다. 그 대신에 그는 그 모토를 자기 책 표지 위에 새겨 넣었다 (1771).

그 이후 20년간 더욱 대담해진 에라스므스는 자기가 믿는 진화 사상을 한층 더 빈번하게 개진했다. 식물의 경제(The Economy of Vegetation, 1792)에서 그는 지구가 우주의 폭발에서 형성되었다고 선언했다.

”무서운 폭발이 높고 높은 저 에텔 천공,
불의 왕국의 깊고 깊은 별자리에서 있던 날.
회오리 치며 태양이 이 무거운 행성을 내 던져
또 다른 세계에 경이로운 빈터를 내 주었던가!”9

The Botanic Garden 에서 그는 생명이 바다로부터 시작되어 거기서부터 점점 발전하였다고 말했다.

”파도 밑 기슭도 없는 저 바닥에서 태어난
유기체 생명이 바다의 진주 동굴에서 자랐던가.
처음엔 미세하여 둥근 유리구슬로도 못 보던 게,
진흙 위를 꿈틀거리다가, 물기 머금은 물질 속을 파고들던
그것들, 세대를 이어주고 이어받아 꽃피웠던가!
새 힘을 얻어 큼직큼직 외지(外肢)를 뻗어냈네.
어디서부터 인고, 수많은 초목들은 저마다 솟아나고,
지느러미 달린 놈, 사지를 가진 놈, 날개도 펄럭이며 숨을 쉰다.”10

그의 주요 저작물, '주노미아(Zoonomia or the Laws of Organic Life, 2 권, 1794년과 1796년에 출판됨)'는 의료에 관한 대작으로서 산문체로 쓰였다. 이 책에는 질병과 치료에 대한 종합적인 분류방법이 포함되어 있다. 출판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서 영국에서 4판, 미국에서 2판이 출판되었다. 그리고 독일어, 프랑스어 그리고 이태리어로 번역됐다. 이 책은 1859년에 출판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보다 65년 전에 출판된 ”최초의 일관된 포괄적 진화 가설” 이라고 불려진다.

에라스므스는, '인류 역사가 시작되기 광대한 시간 전에 (다시 말해서, 수 억 년 전에) 모든 온혈 동물들이 단세포 동물들로부터 생겼다. 그리고 그 단세포 동물들은 그 위대한 최초 원인이 부여해 준 동물성을 몸 속에 지니고, 새로운 지체들을 몸에 생기게 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제 스스로의 내재적인 활동으로 진화를 계속하는 기능을 소유하고 그 진화를 후손들에게 또 세상 끝없이 면면히 이어주는 기능을 발휘한다!' 고 말했다. (I:505)11나중에, 에라스므스는 The Temple of Nature 에서 그 말을 이렇게 이었다. 즉, ”지금 존재하는 모든 식물과 동물들은 원시의 바다에서 자연적인 생명력에 의해 발생한 극도로 미세한 현미경적인 존재들로부터 기원했다”11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사람은 …
살아있는 모든 것을 따뜻한 눈으로 봐라 보아야 하느니.
형제가 되는 개미와 자매가 되는 벌레를.”12

에라스므스는 당시 교회 문화에 유화의 제스처를 보내기 위해서 '위대한 최초의 원인'을 대문자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체 없이, 일단 시작된 진화는 그 어떤 신성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의 내재적인 능력으로 진행되었다”고 단언했다. 그는 맹렬하게 반기독교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자신의 병명 색인에 ”고지식, 미신, 희망, 그리고 지옥공포증”13 과 같은 병명들을 포함시켰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은 위대한 시인 Samuel Taylor Coleridge와 같은 문인들에 의해서 광범위하게 비난 받았다.14 Coleridge는 '다윈화 (darwinizing) ' 라는 단어를 만들어 ‘멋대로 사색한다’ 는 뜻으로 사용하면서, 에라스므스의 진화론 사상을 빗댔다.14 The Temple of Nature는 ”신성의 개입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 때문에 대대적으로 매도되었다. 그리고 ”성경의 종교를 자연의 종교로 대체하려는 노력” 때문에 그는 한층 더 공격을 받았다.15

찰스에게 끼친 에라스므스의 영향

비 록 찰스는 에라스므스가 죽은 지 7년 후에 태어났지만, 그는 아버지 로버트가 '자유분방한 (물질주의적) 사고'와 반기독교적인 에라스므스의 사상을 집안 구석구석에 물들여 놓은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불신앙은 다윈 집안 식구들한테 용납될 수 있는 기질이었다. 다시 말해서 불신앙은 '도덕적 위기 또는 도덕적 반란'이나, 심지어 '불효'의 발로로 취급되지 않았던 것 같다.16

찰스는 18살 때에 주노미아를 읽고 '크게 감탄' 했다. 수년 후 에라스므스가 당했던 비난과 꼭 같은 비난을 받았을 때에, ”10년이나 15년이 지난 지금 읽어보니 나는 그 내용에 크게 실망했다. 저자의 추측은 사실과 너무도 크게 차이가 있었다” 라고 주장하면서, 그는 자기 할아버지의 책17과 인연을 끊으려 노력했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1837년 찰스가 어느 노트에 자기 생각들을 기록할 때, 그는 그 노트의 표제에 주노미아라는 단어를 기입하고 자기가 ”할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밝히려” 했다.19

찰 스의 진화에 대한 주장들 중에서 중요한 대목은 그가 1835년 갈라파고스 군도에 사는 핀치 새의 부리의 모양이 그 곳에 있는 먹이의 형태에 따라서 변했다는 사실이 관찰됐다는 내용에 근거하고 있다. 사실이 이런데 찰스가 이 주제에 대한 에라스므스의 글의 내용에서 영향 받은 바가 없다는 게 믿음이 가는 생각이란 말인가? 다시 말해서, ”일부의 새는 호두를 까기 위해서 딱딱한 부리를 가진다. 또 다른 부류의 새는 참새처럼 씨앗을 깔 수 있을 만큼 적당히 딱딱한 부리를 가진다. 그리고 핀치새처럼 보드라운 꽃씨나 나무의 눈과 같은 먹이를 쪼아 먹기에 적절한 부리를 한 새도 있었다. 긴 부리의 새, 넓적한 부리의 새, 그 모든 새들은 수많은 세대를 거쳐 오면서 끝없이 먹이를 구하려는 노력 끝에 점점 오늘날과 같은 부리로 진화했다”는 주장이었다.20 (I:504)

주노미아에서 검토되었던 주제나 예들 대부분이 찰스의 종의 기원 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사실상, 찰스의 책들 중에서 하나를 빼고 거의 모든 책은 주노미아가 아니면 에라스무스의 시들 중의 어느 한 편의 시에 대한 서평 안에 그 대조 내용이 발견된다.21 그리고 찰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주노미아와 The Botanic Garden의 사본에는 광범한 찰스의 기표나 주석이 가득 적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

그 러므로 에라스므스는 자신의 손자를 통해서 긴긴 그림자를 드리워 온 무신론을 지식인들 사이에서 존경 받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서유럽 사람들의 세계관에 자리 잡고 있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 대신에, ‘세상의 심판자 (창18:25)’ 이신 하나님에 대한 모든 책임에서 자유롭다는 관념을 피력하는 인간적 쾌락주의를 받아들이게 했던 것이다.

오늘 이 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아들, 딸, 그리고 손자, 손녀에게 무엇을 물려줄까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진실된 성경적 세계관을 가르칠 책임이 있다. 진실된 성경적 세계관은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각성과 그 구원으로 가는 길의 근본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이라는 사상이다. 구원으로 가는 길이라 함은, 우리가 우리 죄를 회개하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 가르침은 우리 자녀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사람이 만든 반하나님적 이론이라는 불확실한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만든 반하나님적 이론은 21 세기의 ”최대의 거짓” 사상인 것이다

참고 문헌및 메모

  1. Much of this article is based on King-Hele, D., Erasmus Darwin, Charles Scribner’s Sons, New York, 1963 텍스트로돌아 가기.
  2. Barlw, N., The Autobiography of Charles Darwin, Collins, London, p. 161, 1958, which quotes Charles’s letter to Henry Fawcett (1861) 텍스트로돌아 가기.
  3. Colliers Encylopedia 7:724, 1994. 텍스트로돌아 가기.
  4. Ref. 1, p. 34. 텍스트로돌아 가기.
  5. A Plan for the Conduct of Female Education in Boarding Schools, 1797. 텍스트로돌아 가기.
  6. Ref. 1, p. 73, which quotes The Temple of Nature (I:295–302). 텍스트로돌아 가기.
  7. This is Erasmus’s version of embryonic recapitulation, a concept which Haeckel fraudulently developed as ‘the biogenetic law’, now known to be totally false. See Grigg, R., 헥켈 : 진화론의 전도사이며 속임수의 사도, Creation 18(2):33–36, 1996. 텍스트로돌아 가기.
  8. Ding-Hele, D., The furtive evolutionist, New Scientist 2390:48–49, 12 April 2003. 텍스트로돌아 가기.
  9. www.rochester.edu/College/ENG/eng529/aeza/darwin.htm, 28 August 2003. 텍스트로돌아 가기.
  10. Ref. 1, p. 73. 텍스트로돌아 가기.
  11. Ref. 1, p. 71. Numbers in brackets refer to volume and page numbers in brackets refer to volume and page number in the first edition of Zoonomia. (Ref. 1, p. 46). 텍스트로돌아 가기.
  12. Ref. 1, p. 90, which quotes The Temple of Nature :427–428. 텍스트로돌아 가기.
  13. Ref. 1, pp. 55, 171. 텍스트로돌아 가기.
  14. Nichols, A., Erasmus Darwin (1731–1802), www.dickinson,edu/~nicholsa/Romnat/erasdar.htm, 25 September 2003. 텍스트로돌아 가기.
  15. Ref. 1, p. 137. 텍스트로돌아 가기.
  16. Brentnall, J. and Grigg, R., Darwin’s slippery slide into unbelief, Creation 18(1):34–37, 1995, who quote Himmelfarb, G., Darwin and the Darwinian Revolution, Chatto and Windus, London, p. 10, 1959. 텍스트로돌아 가기.
  17. Towards the end of his life, Charles relented and wrote a biography of Erasmus, The Life of Erasmus Darwin (1880); he allowed his daughter Henrietta to edit this, and she removed 16%, which she thought too salacious for Victorian readers. 텍스트로돌아 가기.
  18. Charles Darwin’s Autobiography (edited by Sir Francis Darwin), Henry Schuman, New York, p. 21, 1950. 텍스트로돌아 가기.
  19. Desmond, A. and Moore, J., Darwin, Penguin Book, London, p. 229, 1992. 텍스트로돌아 가기.
  20. Ref. 1, p. 70. 텍스트로돌아 가기.
  21. Ref. 1, pp. 88, 94. 텍스트로돌아 가기.